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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12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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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6-20 11:57 조회2,6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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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서더튼에서 태어난 아펜젤러는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고 자라나 신학을 공부한 뒤 결혼한 지 두 달 만인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에 입국한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그가 미지의 땅 조선에서 직면한 난관은 가장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도 꺾일 만한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는 외국인에 대해 의심하고 증오하는 나라에서 언어교사나 심지어 책도 없이 언어를 습득했습니다. 선교사로서 그는 이 나라의 모든 지역을 여행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었습니다. 결국 일하던 인부도, 학자들도, 양반 계층들도 정부에서도 그를 진정한 친구로서 여기게 되었으며 중요한 국사를 그와 함께 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를 개척했고 배재학당을 세웠으며 그 안에 삼문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어 기독교 소책자들과 ‘독립신문’등 일반신문도 발행하였고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더불어 성경번역위원회를 최초로 조직해서 한글성경번역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독립협회가 해체되고 주요 인물이 투옥 당하자 아펜젤러는 감옥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이승만, 이상재 선생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는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며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거짓 소문에 의해 군중들이 흥분하여 창과 칼로 위협하고 외국인들을 도시와 시골로부터 몰아내려고 할 그날 밤에도 선교부를 굳게 지켰습니다.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그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조수 한 사람과 부모에게 데려다 주기로 약속한 한 여학생과 같이 배에 승선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해하던 배가 어정도 부근에서 다른 선박과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배는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필사의 탈출을 시작했지만 아펜젤러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선실로 뛰어들었고 결국 배와 함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그의 시신은 결국 찾지 못했으며 현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는 그의 가묘입니다. 이 때 아펜젤러의 나이는 44살이었고 한국에 27살 때 들어왔으니 17년 동안 선교사로 일한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서 살았으며 매순간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여 앞장서소서. 제가 따르겠나이다. 진리와 충성으로 최후의 순간까지 따르겠나이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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