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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과 강화도에 감리교회가 많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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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3-04-24 11:08 조회58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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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년 전 부활절(1885년 4월 5일),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인천 제물포항에 임신 2개월 된 부인과 함께 아펜젤러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와 언더우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조선 땅에 도착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일본-제물포항까지 오는 긴 여정을 거쳐 낯선 땅 조선의 제물포항에 내린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조선 백성들에게 밝은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렸다.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행보는 서로 달랐다. 아펜젤러 부부는 인천에서 첫 밤을 보냈고 언더우드는 조랑말을 타고 한양으로 가 첫 밤을 보냈다. 이 때문에 이후 감리교와 장로교의 조선 선교 방향도 크게 갈리었다. 언더우드는 한양과 조선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친 반면에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는 인천을 중심으로 선교의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아펜젤러는 제물포에 한 달간 머물며 예배를 드렸고 그 자리에 내리교회가 세워졌다. 조선 땅에 세워진 최초의 감리교 교회였다. 그럼 강화도는 어땠을까?
당시 강화도는 고려는 물론이고 조선 시대에도 전략적 요충지였다. 강화도를 통과해야만 한양으로 가는 길목인 마포나루에 배가 닿을 수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서구 열강이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발발했다. 둘 다 강화도에서 발생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난리로 인해 강화도 사람들이 입은 피해는 막대해 강화도민의 서양에 대한 증오와 반감은 무척 컸다. 하지만 지금은 강화도에 있는 감리교회만 그래서 130개 넘는다.
제물포항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려면 한나절이 걸렸던 반면 강화도에서는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인천 다음으로 강화도를 중요한 선교지로 삼았다. 물론 쉽진 않았다.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내리교회를 맡은 존스 선교사는 강화도에 들어가려다 강화 유수(강화를 다스리던 지방 관리)에게 문전박대를 당했고 강화 주민들 반발도 컸다. 서당 훈장이자 양반이었던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가 마을 땅을 밟으면 세례받는 사람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경고했다. 결국 존스 선교사는 배에서 내리지 않은 채 배 위에서 선상 세례를 했는데 강화에서 이루어진 첫 세례였다. 나중에는 완고하던 김상임도 기독교인이 됐고 강화에 첫 교회까지 세웠다. 그 교회가 강화에서 ‘어머니 교회’로 통하는 교산교회다. 교회가 세워진 뒤 마을의 양반과 평민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복음은 비록 많은 반대에 부딪히지만 결국은 승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딤후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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