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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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12-07 14:31 조회5,26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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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입니까?
삼상 4: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4: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아시다시피 요사이 코로나 시대에 전에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다른 교회 다니는 성도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가 나가는 교회는 수백 명이 모이는 중형 교회인데 한 번은 예배 끝나고 중요한 의결 사항이 있어서 총회를 열게 되었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보통 교회 예배 후 총회가 있다고 하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요. 그런데 그 교회는 수백 명 등록 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몇 명이 남지 않아서 총회 구성이 되겠나 싶었는데 그냥 남은 사람들끼리 교회의 중요한 안건들을 통과를 시켰답니다. 끝나고 나서 한 교인이 이렇게 해도 되느냐, 왜 이렇게 성도들이 교회 일에 관심이 없어졌느냐고 목사님에게 물었더니 대답이 ‘성도들이 관심이 없든지 아니면 100% 신뢰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요사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비대면이 자연스런 현상이 되어 가고 있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만나는 것이 도리어 어색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신앙이 현재 어떤 상태 가운데 있는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퇴조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뭔가 모르게 겉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속이 비어가는 것 같습니다.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살아있다는 증거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임을 자각하게 되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아마 사무엘 선지자가 아직 어렸을 때의 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천적인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했습니다. 맞서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사천 명의 군사를 잃고 패하고 맙니다.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모두 당혹해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인데 우리가 왜 패했을까 궁리하던 중 결국 한 가지 해결책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진영이었던 아벡으로부터 약 40 Km 떨어진 실로에서 하나님의 언약궤, 즉 법궤를 가져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과거 출애굽 후 가나안 정복 때에 법궤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가나안 정복의 관문인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전 요단강을 건널 때 일어났던 기적이었지요.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강에 들어가 발을 담그고 멈추자 위에서 흘러 내려오던 물이 뚝 끊어져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그 덕에 이스라엘은 쉽게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또 난공불락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법궤를 앞세우고 일주일 동안 성 주위를 매일 돌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법궤 앞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 묻곤 했습니다.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할 때도 법궤가 있는 성막 앞에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이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법궤를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법궤만 오면 전세가 역전될까요?
어떤 부부가 독일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예수님의 고난 주일 연극을 관람을 하게 되었답니다. 연극이 끝난 뒤 그들은 무대 뒤로 가서 예수님 역을 맡은 배우와 잠시 이야기하다가 연극 중 배우가 지고 가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남편은 배우에게 양해를 구한 뒤 카메라를 부인에게 주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찍어달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가 십자가를 져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이 십자가가 속이 비어 가벼울 줄 알았는데 왜 이리 무거운가요?’ 그 배우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십자가가 무겁지 않았다면 제가 예수님의 역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 신앙의 모습을 혹시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요? 십자가를 지긴 하지만 속이 비어있는 십자가를 지고 싶어하는 모습 말이지요. 신앙은 흉내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 못 갑니다. 바울 흉내를 내다가 아주 큰 봉변을 당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에게 얹으면 병이 낫기도 하고 귀신이 나가기도 했지요.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라는 사람의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마술하는 사람들이 시험 삼아서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해서 명하노라’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자기들도 귀신들린 자에게 시험 삼아 한 번 해보았습니다. 그러자 귀신들린 사람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도대체 너희는 누구냐?’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뛰어 올라서 눌러버렸고 그들은 상처를 입고 벗은 채로 줄행랑을 쳤지요. 어설프게 흉내를 내다가 큰 코를 다친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마귀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짝퉁 그리스도인지를 우리보다 더 안다는 뜻이지요. 마귀는 가짜를 겁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종종 우리의 신앙 속에 자신도 모르게 불순물들이 섞여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성공주의, 쾌락주의가 우리의 삶 속에 버젓이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순도를 잃어가고 세상과 닮음 꼴이 되어가고 맙니다. 겉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쓰여 있는데 속은 비그리스도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가 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멀리 떨어진 실로에서 법궤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법궤에 신통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법궤만 있으면 일시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겠다고 믿었습니다.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언약궤를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이 말에서 무엇이 잘못된 말인지 찾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란 말입니다. 무엇으로요? 법궤로요. 법궤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이지 법궤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궤만 있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변질이 일어났습니다. 속은 비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 탕비실에 가면 과일이 담겨있는 바구니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실물보다 더 실물 같이 만들어서 누구나 한 번씩 이게 진짜인가 하고 손이 갑니다. 한 번은 너무 비슷하고 예뻐서 학교 행사할 때 누가 빌려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은 열매가 아니라 모조품입니다. 먹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가짜는 생명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멀쩡하게 보여도 생명이 없다면 죽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그런 교회가 나옵니다. 바로 사데 교회입니다.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초대 교회에는 이단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가만히 살펴보면 이단 때문에 많은 교회가 피해를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경우 이단과 싸우느라 그만 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고 버가모 교회나 두아디라 교회의 경우 이단과 명확한 선을 긋지 못해서 피해를 입은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어땠을까요? 주님은 교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사데는 보석, 염료, 직물이 생산되는 공업 덕분에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교회가 번듯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으로도 칭찬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에게 살았다는 이름을 가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붙여주신 이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이 교회에 대해 괜찮은 교회, 좋은 교회, 활발한 교회, 살아있는 교회로 평가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그들이 죽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계시록 3장 4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 이유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 교회에는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 몇 명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대부분의 사데 교회 성도들이 옷을 더럽혔다는 의미가 됩니다. 옷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계시록 19장 8절을 봅니다.
계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성결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데 교회 성도들은 세상과의 타협으로 옷을 더럽혔고 이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회가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죽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난 뒤 그들은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법궤를 빨리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을까요? 당시 영적 지도자였던 엘리와 그 자녀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엘리는 눈이 어두워져 가면서 영적인 분별력도 둔감해졌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섬기는 여인들과 불륜을 저질렀는데도, 그리고 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여 제사 드리기도 전에 제물을 빼앗아버리는 악하고 무도한 행실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영적으로 죽어가는 상황에 백성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신앙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을 상실한 신자,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은 신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궤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주일날 교회나오고 십일조 생활만하면 할 일 다한게 아니겠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바가 있겠습니까?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스라엘은 다시 패배했고 급기야 하나님의 법궤는 빼앗겨 이방인 블레셋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전사하고 말았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놀라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 때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가 해산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지만 아무런 관심도 없이 죽어가면서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하고는 죽습니다. 이가봇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쓰던 관에는 글씨를 쓴 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글씨는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자였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는 몸을 성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행하실 때 백성들 모두에게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비결은 성결입니다. 세상의 죄악에서 자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별 생각 없이 세상과 벗 삼아 살아갑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세상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성결을 버리면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갑니다. 성결을 잃게 되면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고 성령님의 역사를 소멸시킵니다. 성결은 하나님 앞에 구별되는 삶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욕망을 거부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겉으로는 활발하고 문제없이 보여도 우리 중심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의 문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성결을 더럽히는 것 중 하나가 '성공주의'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목회자 마음속에 목회 성공이 중심에 있다면 그 목회자와 교회는 죽어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은 사라지고 인간적으로 열심히 하는 성취욕만 남아 빈껍데기가 될 것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이 은퇴 전에 남기신 말은 늘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디가나 한국 사람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성도들만큼 열심이 대단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믿음, 열심을 가지고 책망하시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할렐루야, 아멘 많이 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밖에 나가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오면 열대지방에 살 것 같은데 밖에 나가면 한대지방에 삽니다. 너무 이상합니다. 목사, 장로 다 그렇습니다. 뜨겁고 열심히 사는 것과 거룩하게 사는 것은 별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 전도단의 로렌 커닝햄 목사가 한국을 방문했다가 호주에서 작은 기도 모임을 인도하다가 주님이 주신 마음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돈을 너무 사랑한다. 지도자들이 음란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돈을 너무 사랑하고 지도자가 성적으로 부도덕해지고 성공 지향적으로 되어버리는 것은 옷을 더럽히는 행위입니다. 이것을 '세속화'라고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성공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성결보다 성공을 좋아하고 성공이 목적이 될 때 우리는 성결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양육할 때에 무엇을 중요하게 가르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성결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의 성공입니까? 자녀가 결혼 대상과 만나기 시작할 때 부모가 물어보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보통 '걔 직장이 어디야?' '부모는 뭐하는 사람이야?' 먼저 묻게 되지요. 일단 신앙은 두 번째 순위로 밀려버립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공이 주제가 되는 세미나를 열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입니다.
기독교 실업인회에서 IT 회사를 경영하는 어떤 여성 CEO가 나눈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모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부딪치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인도에 세운 회사가 잘 되니까 그 쪽에서 사겠으니 팔라는 제안이 왔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지요. 팔아서 그 돈으로 선교하면 되지 않겠나 생각도 들었지만 회사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선교를 위한다는 목적과는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팔면 더 이상 그 회사는 선교하는 회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또 회사가 병역 특혜를 받는 기업이 되면 이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 남편이 편법을 써서 그 자격을 받아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남편을 설득하여 그 자격을 반납하기도 했습니다. 또 일반적으로 IT단지에 입주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시세 차익 100억 정도가 생기기 때문에 돈을 받아 챙기고 다른 데로 옮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만일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얼마 지나서 다른 방법으로 큰 복을 주셨더라...이렇게 나와야 뭔가 맞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몇 년간 기다려도 매출이 계속 떨어지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기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칙대로 운영하기 위해 희생하면 회사가 부자 될 것이라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저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할 수 있다는 자체가 바로 복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결이 아닌 성공이 목적이 되면 옷이 더러워집니다.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성결은 성공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 십자가를 놓치면 교회가 죽고 개인이 죽습니다. 좋은 차, 좋은 옷, 자식이 좋은 학교 들어가면 신앙적으로 성공한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 안에서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는데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죽어가는 교회였지만 그중 몇 사람이 살아 있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성결을 지킨 자들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우리에게 정말 좋은 교회를 주님이 주셨습니다. 주차장 때문에 주일마다 난리법석하는 것도 아니고 빚진 교회도 아니고 정말 우리에게 외부적으로는 별 부족함이 없는 교회입니다. 그렇다고 번듯한 건물이 살아있는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결한 삶을 살지 못하면 죽게 되고 껍데기만 남은 교회, 속빈 교회가 될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성결을 잃어버렸을 때 법궤를 빼앗기고 전쟁에서 무참히 패한 것처럼 우리가 성결을 잃는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교회라 해도 실패한 교회, 실패한 인생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 오실 때 어떤 옷을 입고 서시겠습니까? 우리가 중요한 분을 만날 때는 가장 좋은 옷, 가장 께끗한 옷을 입고 나가지 않습니까? 평생 신기루같은 성공을 보고 쫓다가 더럽혀진 옷을 입고 주님을 만나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데 교회에 남은 몇 사람처럼 흰 옷을 입고 만나시겠습니까? 문제는 성결입니다.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 대가를 치르시겠습니까? 지금은 정말 정신 차려야 할 때입니다.
삼상 4: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4: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아시다시피 요사이 코로나 시대에 전에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다른 교회 다니는 성도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가 나가는 교회는 수백 명이 모이는 중형 교회인데 한 번은 예배 끝나고 중요한 의결 사항이 있어서 총회를 열게 되었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보통 교회 예배 후 총회가 있다고 하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요. 그런데 그 교회는 수백 명 등록 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몇 명이 남지 않아서 총회 구성이 되겠나 싶었는데 그냥 남은 사람들끼리 교회의 중요한 안건들을 통과를 시켰답니다. 끝나고 나서 한 교인이 이렇게 해도 되느냐, 왜 이렇게 성도들이 교회 일에 관심이 없어졌느냐고 목사님에게 물었더니 대답이 ‘성도들이 관심이 없든지 아니면 100% 신뢰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요사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대한 관심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비대면이 자연스런 현상이 되어 가고 있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만나는 것이 도리어 어색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신앙이 현재 어떤 상태 가운데 있는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퇴조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뭔가 모르게 겉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속이 비어가는 것 같습니다.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살아있다는 증거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임을 자각하게 되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아마 사무엘 선지자가 아직 어렸을 때의 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천적인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했습니다. 맞서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사천 명의 군사를 잃고 패하고 맙니다.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모두 당혹해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인데 우리가 왜 패했을까 궁리하던 중 결국 한 가지 해결책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진영이었던 아벡으로부터 약 40 Km 떨어진 실로에서 하나님의 언약궤, 즉 법궤를 가져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과거 출애굽 후 가나안 정복 때에 법궤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가나안 정복의 관문인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전 요단강을 건널 때 일어났던 기적이었지요.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강에 들어가 발을 담그고 멈추자 위에서 흘러 내려오던 물이 뚝 끊어져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그 덕에 이스라엘은 쉽게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또 난공불락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법궤를 앞세우고 일주일 동안 성 주위를 매일 돌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법궤 앞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 묻곤 했습니다.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할 때도 법궤가 있는 성막 앞에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이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법궤를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법궤만 오면 전세가 역전될까요?
어떤 부부가 독일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예수님의 고난 주일 연극을 관람을 하게 되었답니다. 연극이 끝난 뒤 그들은 무대 뒤로 가서 예수님 역을 맡은 배우와 잠시 이야기하다가 연극 중 배우가 지고 가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남편은 배우에게 양해를 구한 뒤 카메라를 부인에게 주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찍어달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가 십자가를 져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이 십자가가 속이 비어 가벼울 줄 알았는데 왜 이리 무거운가요?’ 그 배우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십자가가 무겁지 않았다면 제가 예수님의 역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우리 신앙의 모습을 혹시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요? 십자가를 지긴 하지만 속이 비어있는 십자가를 지고 싶어하는 모습 말이지요. 신앙은 흉내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 못 갑니다. 바울 흉내를 내다가 아주 큰 봉변을 당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에게 얹으면 병이 낫기도 하고 귀신이 나가기도 했지요.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라는 사람의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마술하는 사람들이 시험 삼아서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해서 명하노라’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자기들도 귀신들린 자에게 시험 삼아 한 번 해보았습니다. 그러자 귀신들린 사람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도대체 너희는 누구냐?’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뛰어 올라서 눌러버렸고 그들은 상처를 입고 벗은 채로 줄행랑을 쳤지요. 어설프게 흉내를 내다가 큰 코를 다친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마귀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짝퉁 그리스도인지를 우리보다 더 안다는 뜻이지요. 마귀는 가짜를 겁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종종 우리의 신앙 속에 자신도 모르게 불순물들이 섞여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성공주의, 쾌락주의가 우리의 삶 속에 버젓이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순도를 잃어가고 세상과 닮음 꼴이 되어가고 맙니다. 겉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쓰여 있는데 속은 비그리스도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가 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멀리 떨어진 실로에서 법궤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법궤에 신통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법궤만 있으면 일시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겠다고 믿었습니다.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언약궤를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이 말에서 무엇이 잘못된 말인지 찾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란 말입니다. 무엇으로요? 법궤로요. 법궤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이지 법궤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궤만 있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변질이 일어났습니다. 속은 비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 탕비실에 가면 과일이 담겨있는 바구니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실물보다 더 실물 같이 만들어서 누구나 한 번씩 이게 진짜인가 하고 손이 갑니다. 한 번은 너무 비슷하고 예뻐서 학교 행사할 때 누가 빌려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은 열매가 아니라 모조품입니다. 먹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가짜는 생명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멀쩡하게 보여도 생명이 없다면 죽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그런 교회가 나옵니다. 바로 사데 교회입니다.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초대 교회에는 이단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가만히 살펴보면 이단 때문에 많은 교회가 피해를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경우 이단과 싸우느라 그만 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고 버가모 교회나 두아디라 교회의 경우 이단과 명확한 선을 긋지 못해서 피해를 입은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어땠을까요? 주님은 교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사데는 보석, 염료, 직물이 생산되는 공업 덕분에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교회가 번듯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으로도 칭찬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에게 살았다는 이름을 가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붙여주신 이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이 교회에 대해 괜찮은 교회, 좋은 교회, 활발한 교회, 살아있는 교회로 평가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그들이 죽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계시록 3장 4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 이유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 교회에는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 몇 명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대부분의 사데 교회 성도들이 옷을 더럽혔다는 의미가 됩니다. 옷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계시록 19장 8절을 봅니다.
계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성결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데 교회 성도들은 세상과의 타협으로 옷을 더럽혔고 이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회가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죽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난 뒤 그들은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법궤를 빨리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을까요? 당시 영적 지도자였던 엘리와 그 자녀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엘리는 눈이 어두워져 가면서 영적인 분별력도 둔감해졌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섬기는 여인들과 불륜을 저질렀는데도, 그리고 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여 제사 드리기도 전에 제물을 빼앗아버리는 악하고 무도한 행실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영적으로 죽어가는 상황에 백성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신앙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을 상실한 신자,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은 신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궤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주일날 교회나오고 십일조 생활만하면 할 일 다한게 아니겠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바가 있겠습니까?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스라엘은 다시 패배했고 급기야 하나님의 법궤는 빼앗겨 이방인 블레셋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전사하고 말았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놀라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 때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가 해산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지만 아무런 관심도 없이 죽어가면서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하고는 죽습니다. 이가봇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쓰던 관에는 글씨를 쓴 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글씨는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자였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는 몸을 성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행하실 때 백성들 모두에게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비결은 성결입니다. 세상의 죄악에서 자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별 생각 없이 세상과 벗 삼아 살아갑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세상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성결을 버리면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갑니다. 성결을 잃게 되면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고 성령님의 역사를 소멸시킵니다. 성결은 하나님 앞에 구별되는 삶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욕망을 거부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겉으로는 활발하고 문제없이 보여도 우리 중심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의 문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성결을 더럽히는 것 중 하나가 '성공주의'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목회자 마음속에 목회 성공이 중심에 있다면 그 목회자와 교회는 죽어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은 사라지고 인간적으로 열심히 하는 성취욕만 남아 빈껍데기가 될 것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이 은퇴 전에 남기신 말은 늘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디가나 한국 사람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성도들만큼 열심이 대단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믿음, 열심을 가지고 책망하시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할렐루야, 아멘 많이 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밖에 나가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오면 열대지방에 살 것 같은데 밖에 나가면 한대지방에 삽니다. 너무 이상합니다. 목사, 장로 다 그렇습니다. 뜨겁고 열심히 사는 것과 거룩하게 사는 것은 별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 전도단의 로렌 커닝햄 목사가 한국을 방문했다가 호주에서 작은 기도 모임을 인도하다가 주님이 주신 마음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돈을 너무 사랑한다. 지도자들이 음란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돈을 너무 사랑하고 지도자가 성적으로 부도덕해지고 성공 지향적으로 되어버리는 것은 옷을 더럽히는 행위입니다. 이것을 '세속화'라고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성공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성결보다 성공을 좋아하고 성공이 목적이 될 때 우리는 성결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양육할 때에 무엇을 중요하게 가르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성결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의 성공입니까? 자녀가 결혼 대상과 만나기 시작할 때 부모가 물어보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보통 '걔 직장이 어디야?' '부모는 뭐하는 사람이야?' 먼저 묻게 되지요. 일단 신앙은 두 번째 순위로 밀려버립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공이 주제가 되는 세미나를 열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입니다.
기독교 실업인회에서 IT 회사를 경영하는 어떤 여성 CEO가 나눈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모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부딪치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인도에 세운 회사가 잘 되니까 그 쪽에서 사겠으니 팔라는 제안이 왔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지요. 팔아서 그 돈으로 선교하면 되지 않겠나 생각도 들었지만 회사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선교를 위한다는 목적과는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팔면 더 이상 그 회사는 선교하는 회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또 회사가 병역 특혜를 받는 기업이 되면 이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 남편이 편법을 써서 그 자격을 받아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남편을 설득하여 그 자격을 반납하기도 했습니다. 또 일반적으로 IT단지에 입주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시세 차익 100억 정도가 생기기 때문에 돈을 받아 챙기고 다른 데로 옮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만일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얼마 지나서 다른 방법으로 큰 복을 주셨더라...이렇게 나와야 뭔가 맞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몇 년간 기다려도 매출이 계속 떨어지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기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칙대로 운영하기 위해 희생하면 회사가 부자 될 것이라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저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할 수 있다는 자체가 바로 복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결이 아닌 성공이 목적이 되면 옷이 더러워집니다.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성결은 성공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 십자가를 놓치면 교회가 죽고 개인이 죽습니다. 좋은 차, 좋은 옷, 자식이 좋은 학교 들어가면 신앙적으로 성공한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 안에서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는데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죽어가는 교회였지만 그중 몇 사람이 살아 있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성결을 지킨 자들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우리에게 정말 좋은 교회를 주님이 주셨습니다. 주차장 때문에 주일마다 난리법석하는 것도 아니고 빚진 교회도 아니고 정말 우리에게 외부적으로는 별 부족함이 없는 교회입니다. 그렇다고 번듯한 건물이 살아있는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결한 삶을 살지 못하면 죽게 되고 껍데기만 남은 교회, 속빈 교회가 될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성결을 잃어버렸을 때 법궤를 빼앗기고 전쟁에서 무참히 패한 것처럼 우리가 성결을 잃는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교회라 해도 실패한 교회, 실패한 인생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 오실 때 어떤 옷을 입고 서시겠습니까? 우리가 중요한 분을 만날 때는 가장 좋은 옷, 가장 께끗한 옷을 입고 나가지 않습니까? 평생 신기루같은 성공을 보고 쫓다가 더럽혀진 옷을 입고 주님을 만나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데 교회에 남은 몇 사람처럼 흰 옷을 입고 만나시겠습니까? 문제는 성결입니다.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 대가를 치르시겠습니까? 지금은 정말 정신 차려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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