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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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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1-03-09 09:48 조회4,30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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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의 원리

고후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오늘은 오랜만에 헌금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보통 목회자들이 설교하기가 쉽지 않은 주제가 바로 헌금입니다. 왜냐면 돈 문제는 자칫하면 정죄감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오해나 거부감을 주기도 하는 주제이라 조심스럽기 때문입니다. 정죄감을 준다는 것은 특별히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마치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오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헌금 이야기를 하면 교회를 사업체처럼 생각하거나 혹은 목회자가 돈을 밝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이 있기 때문이며 거부감을 준다는 것은 설교 시간에 세속적인 돈 이야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성경에서 많은 부분 물질에 대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의 조사에 의하면 물질이나 돈과 관계된 구절이 2,800번 이상 언급이 되어 있고 이 숫자는 성경의 가장 큰 주제인 사랑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신앙과 물질 문제는 깊이 연관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부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청부론, 즉 깨끗한 부자가 되어 많이 벌어 하나님께 드리고 사람들을 돕는 일에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반대로 청빈론, 깨끗한 가난이 경건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질문들도 많습니다. 만일 99만 9천 9백 원을 받으면 십일조를 정확하게 9만 9천 9백 원을 내어야 하는가? 십일조를 안내면 진짜 벌을 받는가? 세금을 떼기 전에 십일조인가 아니면 떼고 난 후의 십일조인가? 십일조를 꼭 본 교회에 내야 하는가? 등의 수많은 의문과 논쟁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오늘 설교를 통해서 모든 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적인 원리에 따라 각자가 기도하고 결정해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새신자가 침례를 받으려고 물에 들어갔다가 침례 받기 직전에 난감한 얼굴로 목사님에게 말했답니다. ‘목사님 깜빡하고 제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안 꺼냈어요.’ 그러자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괜찮습니다. 지갑도 회개해야하니까요.’ 찰스 스펄전 목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은 회개를 나는 믿을 수가 없다.’ 우리가 진정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우리 속에 성령님이 계신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삶의 열매가 진정성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 삶의 열매 중 하나가 바로 물질에 대해 변화된 태도라고 볼 수가 있지요.

먼저 우리가 헌금의 대명사처럼 알고 있는 십일조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십일조에 대한 첫 언급은 창세기의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서로 소유가 풍부해지자 함께 거할 수가 없어서 서로 헤어지는 결단을 했는데 롯은 물이 풍부한 동쪽 요단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네 왕과 다섯 왕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롯은 그 틈바구니에서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을 삼촌 아브라함은 훈련된 318명을 이끌고 쫒아가서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왕들을 쳐부수고 롯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소유, 그리고 이웃 사람들까지 구출하여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두 왕이 아브라함을 환영하고 영접했는데 한 사람은 살렘왕 멜기세덱이었고 다른 사람은 소돔왕 베라였습니다. 먼저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준비해 아브라함을 맞으며 이렇게 축복합니다.
창 14: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멜기세덱이 하나님께 대해 언급한 내용을 다시 보십시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천지의 주재’라는 뜻은 천지의 창조주며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아브리함에게 대적을 붙이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드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는 바로 이런 정신이 바탕이 됩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의 소유주시라는 믿음에서 출발해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형 에서와의 갈등으로 인해 도망가면서 벧엘에서 돌베게를 베고 잠을 자던 중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이런 고백을 드리지요.
창 28: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8: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그가 어떻게 서원을 지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언급한 십일조는 율법 시대 이전에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후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으면서 하나님과의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십일조는 의무가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세 종류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레위인의 십일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십일조는 레위 지파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레위 자손은 제사와 성막에 관련한 봉사에만 전념해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치는 십일조로 생계에 얽매이지 않고 주어진 종교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레위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10분의 1을 떼어 제사장에게 바쳐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는 절기의 십일조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은 온 가족이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레위인들과 더불어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여행하기가 너무 멀어 힘들 때에는 그 십일조를 돈으로 바꾸었다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우양이나 포도주 등 자신이 원하는 품목으로 바꾸어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가난한 자의 십일조, 혹은 구제의 십일조로 불리는데 매 3년마다 한 번씩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3년마다 한 번씩 10%를 바치는 것이므로 매년 단위로 나누면 일 년에 3.3%가 될 것입니다. 이 십일조는 공동체 내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위해 비축하여 두었다가 사용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십일조를 모두 합해서 계산한다면 과연 얼마가 될까요? 매년 레위인의 십일조 10%, 절기의 십일조 10%, 구제의 십일조 3.3% 모두 합하면 23.3%가 됩니다. 다시 말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려야 할 십일조는 10%가 아니라 23.3%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세 가지 종류의 십일조는 결국 ‘한 종류의 십일조를 다른 명목으로 말한 것인가? 아니면 아주 분명하게 세 종류의 십일조를 나누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들이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즉 어떤 분은 10%를 드리되 어떤 해는 레위의 십일조로 드리고 어떤 해는 절기의 십일조로 드렸으며 어떤 해는 구제의 십일조로 이름만 바뀌어 드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최소 10% 이상 23.3%내에서 드렸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십일조는 아브라함과 야곱같이 족장 시대에는 자발적인 십일조를 드렸지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시대에서는 분명히 의무적인 조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시 말해 반드시 드려야 하는 법이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율법 시대 이후 신약 시대에는 어떻게 될까요?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분들이 주장하는 근거로 크게 두 가지 말씀을 예로 듭니다. 먼저는 말라기 말씀이지요. 3장 8절입니다.
말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어떤 분들은 어쨌든 10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지고 십일조를 안 하는 교인들을 도둑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말씀에 대해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말라기가 아직 율법 시대의 선지자였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율법에 대한 의무가 당연히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룹바벨의 인도로 제 1차 바벨론으로부터 귀환을 했을 때 그들은 황폐한 상황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런 중에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주위 이방인들의 방해에 막혀 약 15년 간 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그들의 신앙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십일조는 성전에서 섬기는 레위인들의 생활비를 위해서, 그리고 성전 건물을 유지 보수하는데 꼭 필요했습니다. 생활이 힘들어지자 그들은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주위 이방인들의 관습에 점차 동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동거 동락한 아내를 학대하거나 버리고 다른 이방신을 섬기는 여인과 결혼하였으며 제사는 형식상 안 드릴 수는 없어서 눈먼 것, 저는 것 , 병든 것 등 율법에서 금한 것을 드렸습니다. 당연히 십일조도 소홀했지요. 십일조가 없어졌다는 것은 한 마디로 그들의 신앙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자로 책망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율법이 있었고 성전이 있었으며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도 하나의 율법적인 의무였습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율법이 완성되었고 성전과 제사장, 그리고 그들을 통해 드리던 성전 제사, 절기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성전과 절기를 지키기 위한 십일조,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의 필요성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가 지켜져야 한다는 분들은 또 다른 신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마 23장 23절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요.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에 대해 얼마나 철저했는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정확히 계산해서 드렸습니다. 이것들은 주로 음식에 조미료로 사용하던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십일조의 정신을 망각했습니다. 율법의 의무보다 중요한 율법의 정신 즉,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그저 형식적인 의무 조항으로 묶어버린 잘못을 꾸짖으신 것이었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는 율법 아래에 나셔서 할례도 받으셨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제 율법의 완성자가 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 아래서의 제사는 이제 더 이상 지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어떻게 될까요? 물론 강제 율법 조항으로서의 십일조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이후 십일조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정신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이제 이스라엘 성전은 사라졌습니다. 절기도 없어졌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위한 십일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약적 의미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후 9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후 9: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구약 시대에 십일조를 통해서 사명을 감당하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있었듯이 오늘날에는 복음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 안에는 목회자 등의 전임 사역자가 포함되겠지요. 성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십일조를 통해 생활했듯이 복음 전하는 자들도 그럴 권리가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 시대에 십일조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정 부분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떨까요? 가난한 자는 이 땅에서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그리고 바울은 각각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다른 선교 대상을 위해 일하면서 서로 협력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이방 선교를 맡은 바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갈 2장입니다. 
갈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율법에서 말씀한 가난한 자의 십일조는 없어졌지만 가난한 자를 위한 필요는 남았습니다. 바로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연보를 마련하기 위해 고린도 성도들에게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장입니다. 특별히 헌금에 대한 몇 가지 원칙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게도냐 성도들이 어떻게 헌금을 했는지를 8장에서 보여줍니다. 그들은 결코 부유한 가운데 헌금을 한 것이 아닙니다. 환란의 많은 시련이 있었고 가난했지만 넘치도록,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의무감이란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8장 4-5절에서 말씀합니다. 
고후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8: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그들은 극한 가난 중에서도 가난한 성도를 돕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기를 간절히 구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어떻게 보면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드리기를 꺼려합니다. 하지만 마게도냐 성도들은 정반대였습니다. 가난한 중에서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헌금을 의무적으로 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마음에 정한대로 하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아까와 하면서 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무적으로 인색한 마음으로 하는 헌금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헌금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요. 더구나 십일조는 율법의 의무니 율법에서 자유해진 우리는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원칙이 있습니다. 갈 5장입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비록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지만 그 자유는 마음대로 살아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자발적으로 섬기는 삶을 사는 은혜아래서의 삶인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절기, 성전 유지를 위한 율법적인 십일조는 더 이상 지킬 필요는 없지만 복음 전하는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은 분명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고민스런 문제는 얼마만큼을 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가 결혼식이나 상가에 축의금이나 부의를 할 때 고민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얼마를 하면 좋을까하는 문제지요. 그래서 보통 직장 동료는 어느 정도, 친한 친구는 얼마, 친척은 어느 정도라는 개략적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부담이 덜어지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은 우리에게 헌금에 있어 좋은 가이드라인을 제공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지혜이며 헌금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10분의 일이지요. 물론 반드시 10분의 1을 드려야 할 의무는 없지만 구약의 율법수준을 뛰어넘어 은혜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한계선으로 십일조를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은혜의 삶이 율법의 의무로 사는 삶보다 기대치가 높은 이유는 의무감이나 억지가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 감사함, 자유함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무감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금액을 스스로 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 시작할 때 5% 정도는 기쁨으로 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 거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성장할수록 그 %가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면서 아까운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내 것을 드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릴 부분을 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지요. 구약의 십일조 개념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신약시대도 동일합니다. 어떤 사람이 100만원 벌 때 10만원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1,000만원 벌 때 100만원하려니 부담이 되어 하나님께 기도드렸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대답하시길 ‘그럼 다시 100만원 벌게 해 주랴?’고 하셨다나요. 물론 가진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것은 상당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6절입니다.
고후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입니다. 헌금은 마치 심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열매를 거두기 위해 뿌리는 씨앗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응답으로 돌아옵니다. 단,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10을 드리면 늘 그 이상으로 갚아 주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몇 년 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어떤 대형교회는 90일 십일조 캠페인을 벌렸습니다. 앞으로 90일 동안 십일조를 실천해서 만일 하나님이 드린 이상으로 축복해 주시지 않으시면 그 돈을 전액 환불해 주겠다고 말이지요. 결과적으로 헌금 액수가 증가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헌금은 거래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린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자발적인 가난 속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 물질을 심을 때 받는 복은 없어질 현세적인 복이 아니라 영원에 속한 복입니다. 제 추측으로 하늘나라에 있는 계좌는 아마  배당 수익이 이 땅에서 경함하지 못할 고수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경험하게 되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드리는 사람에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아직 헌금을 하지 못하고 있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만큼 시작해 보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 은혜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은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리 준비하고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수입이 일정치 않으면 그에 따라 마음으로 정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드리는 사람에게 축복과 은혜인 것입니다. 마치 마게도냐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은혜로 여겼듯이 모두 그 은혜에 동참하는 경성대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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