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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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1-03-09 09:50 조회4,063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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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막 8: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8: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8: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8: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8: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8: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혹시 마취를 당해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간혹 간단한 수술을 위해 쓰는 국소 마취제 주사를 맞고 나서 얼얼하고 무감각한 감각이 몇 시간 동안 지속되는 느낌은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닐 것입니다. 보통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는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는 방법이 있지요. 가장 흔한 방법은 눈동자에 빛을 비춰보는 것인데 눈동자가 빛을 받으면 보통 축소되기 때문에 뇌의 이상을 체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지요. 빛에도 눈동자 크기의 반응이 없다면 심각한 뇌손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꼬집어보는 것입니다. 꼬집을 때 반응이 없는 경우도 좀 심각한 상태라고 볼 수 있지요. 즉, 몸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거나 둔감할 때는 뇌의 손상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몸의 반응이 둔하다면 문제가 있지요.
또 알아듣는 것이 느릴 때 우리는 둔하다는 말을 흔히 쓰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오래전 유머 중에 사오정 시리즈가 유행했는데 그 중 하나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지요. 한 번은 선생님이 수업 중에 필기하지 않고 딴 짓하는 사오정을 보고 호통을 칩니다.
선생님 : 야, 거기 맨 뒤! 너 필기 안 하고 뭐하고 있어?
사오정 : 칠판이 안 보여서요.
선생님 : 그래? 네 눈이 몇인데?
사오정 : 제 눈은 두 개인데요
선생님 : 아니 그거 말고, 네 눈이 얼마냐고?
사오정 : 제 눈은 돈 받고 파는 게 아닌데요.
선생님 : 야, 그게 아니고 눈이 얼마나 나쁘냐고?
사오정 : 제 눈은 뭐.....나쁘고 착하고 그런 거 없는데요.
시력이 얼마인지 0.1인지 0.2인지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사오정을 보고 우리는 참 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시각으로 볼 때 문제는 마음의 둔함입니다. 마음의 둔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할까요? 먼저 막 6장 52절 말씀을 봅니다.
막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라 빈들까지 온 무리들이 굶주린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남은 조각만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거두는 이적을 행하시고 무리를 다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배타고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자신은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지요. 그런데 이른 새벽 무렵 제자들이 세찬 바람 가운데 힘들게 노를 젓는 것을 보시고 바다 위를 걸어 배 가까이 가셨을 때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모두 깜짝 놀라 ‘유령이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하시고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갑자기 잔잔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한 마디로 기절초풍할 할 뻔 했다는 말이지요.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그토록 놀란 이유를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 질량불변의 자연 법칙을 넘어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 에서 중력의 법칙을 넘어 자연 환경을 지배하시는 능력을 보고 기겁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기쁨과 경탄의 놀람이 아닌 극도의 불안과 공포의 놀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놀란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둔하여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지 사흘이 되어 자칫 기진할 것을 보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얼마 전에 동일한 상황에서 배울 수 있었던 믿음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학습결과를 도루묵이라고 하지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의 의미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꾸준한 학습의 결과로 성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말씀을 삶 가운데 응용하는 학습을 통해서 조금씩 자라게 되지요.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마치 동일한 원리를 이용한 다양한 수학 문제들을 풀면서 그 원리나 법칙을 이해하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즉, 원리를 알고 나면 문제들을 살짝 바꾸어도 풀 수가 있게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조그만 다른 문제를 만나면 그만 당황해하기가 일수입니다.
예수님은 이번에 떡 다섯이 아닌 떡 일곱과 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 거두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을 먹이고 흩어 보내신 뒤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신 주님은 트집 잡고 따지는 바리새인들을 만나시게 됩니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자 단호히 거절하신 후 다시 배에 오르셔서 벳새다로 향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의도는 누룩처럼 악영향을 미치는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교훈을 조심하라고 하신 뜻이었는데 제자들은 번지수를 잘못 읽었습니다. 마침 가지고 온 떡이 하나밖에 없었던지라 ‘우리가 떡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그러시는가보다’라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막 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리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열둘입니다.’ 또 물으십니다.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그들이 또 대답합니다. ‘일곱입니다.’
마음이 둔한 제자들의 믿음을 세우시기 위해 예수님은 처음부터 다시 그들의 기억을 되살리시며 깨닫도록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8: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주님은 ‘얼마 전에 내가 베푼 이적들을 금방 까먹어버렸느냐? 그리고 그 이적들을 몇 번씩 보아도 내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느냐? 눈과 귀, 그리고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하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이샤라 빌립보를 가셨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시지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지요.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자신이 고난 받아 죽임을 당하신 후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시지만 베드로가 갑자기 나서서 ‘그리하지 마옵소서.’ 예수님을 만류하다가 냉엄한 책망을 받지요. 제자들은 누구보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으나 예수님을 정확히 몰랐습니다. 영광의 주님은 생각해도 고난의 주님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말씀을 몇 번 해 주셔도 묻기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싫어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둔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42:20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아무 말씀을 안 하신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귀에 거슬리거나 보기 싫은 것은 애써 피하려고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도 내가 보고 싶은 것에, 내가 좋아하는 곳에 빨간 줄을 치고 더럽혀있지만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부분, 내가 싫어하는 부분은 늘 깨끗하게 비어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말씀을 볼 때에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것,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말씀에 더욱 마음을 열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둔해집니다. 이런 상태를 에스겔 선지자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겔 33:31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2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자기가 듣고 싶은 메시지만 듣는 것,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마음이 둔해지는 지름길입니다. 왜 그럴까요? 변화에 대한 저항감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압력을 받게 되면 보통 저항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변화에 대해 겸손하게 마음을 열지 않고 이런 상태를 고집한다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마 13장에서 말씀합니다.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음이 둔해지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굳어져 버리는 것이지요. 이것은 변화 받기 싫어하는 단계를 넘어서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한 번 굳어지면 돌이키기가 어렵습니다. 겨울에 꽁꽁 얼어 굳어진 땅을 갈아엎으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을 때 선지자 예레미야는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게 항복하라고 합니다. 항복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전하지요. 하지만 시드기야는 끝까지 하나님이 바벨론 군대를 물러가게 하실 것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옳고 그름,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비진리인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엡 4장 말씀입니다.
엡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를 마음이 굳어 있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큰 소리를 외쳐도 아무리 흔들어도 꼼짝을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말씀에 대해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오히려 의지적으로 거부하고 불순종하지요. 마음이 굳어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쓸데없는 논쟁만 초래할 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선교하던 중에 이런 사람들의 만나자 그들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행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마음이 둔해지는 것은 그나마 살아있긴 한데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 상태를 방임하면 마음이 굳어지기 쉽습니다. 의지적으로 말씀을 저항하게 되는 것이지요. 만일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반드시 징계하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마음이 굳어진 사람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보통 교회에 나오질 않지요. 만일 저와 여러분이 그래도 교회에 나가겠다는 마음이 들면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둔해진 상태일수 있습니다. 하루 동안 말씀을 보고 싶은 의욕이나 갈망이 없다면, 일주일 내내 성경 한 장 보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면,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자꾸 거슬리는 말이 생간다면,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다면, 찬송을 해도 마음이 차갑고 냉랭하다면, 형제자매들이나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조심하십시오. 내 마음이 둔해져 있는 증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경고등이 켜진 상태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갑자기 오지는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올 때가 많고 문제는 그런 상태라 해도 자기는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마음이 둔해지면 위기 상황에도 잘 반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설마 하다가 큰 코 다치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둔해지는 증상 중 하나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 중 다섯 처녀가 설마하면서 등불에 기름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 막상 신랑이 오자 황급히 기름을 사러 갔다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원인이 뭘까요? 예수님은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라고 말씀하십니다. 방탕과 술 취함 같은 쾌락과 염려는 말씀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다가 올 위기에 반응하는 것조차 둔감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말씀합니다.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염려와 향락은 재물과 연관성이 많습니다. 재물이 없으면 염려하기 쉽고 재물이 많으면 향락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난과 궁핍에 대한 염려가 그들을 힘들게 하는 무거운 짐이 되지만 반면 부자에게는 재물을 혹시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어떻게 하면 더 불릴 수가 있을까하는 근심걱정과 더불어 또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길까라는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물질이 많든 적든 간에 물질이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서 주님이 마음 중심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주님이 멀어지면 말씀도 멀어져서 점점 마음에 염려나 쾌락 같은 가시떨기가 자라게 되어 마음은 둔해집니다.
재물은 사람을 속이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재물을 얻을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감사 대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여기기보다 자신의 쾌락과 편안함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쾌락은 어떨까요? 세상의 즐거움을 지나치게 추구하다보면 분별력이 약화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염려와 쾌락은 마치 잡초와 같이 번식력이 강하여 빠른 시간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버립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루 동안에 내가 주로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염려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즐거움에 마음이 빼앗겨 있습니까?
사사시대 때의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태어난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힘이란 특별한 은사를 부여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들릴라라는 이방 여인을 사랑하다가 파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에게 몇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기 위해 조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세 번씩이나 엉뚱한 대답을 함으로 위기를 피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이 주신 그 비밀을 말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날마다 그녀가 재촉하고 조르자 그는 번뇌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그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유혹에 굴복해 버립니다. 나실인으로서 그 힘의 비밀에 머리카락에 있다는 것을 실토하자 들릴라는 삼손이 잠든 틈을 이용해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리고 매복해 있던 블레셋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삼손이 벌떡 일어나서 이전처럼 힘을 써 보려고 했지만 그는 무력해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삿 16: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삼손은 그 결과로 눈을 잃게 되고 끌려가 놋줄에 매여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삼손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경각심을 일으킵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이 둔하여져서 염려나 쾌락에 빠지고 죄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린 상태로 살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사실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하나님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늘 말씀에 민감한 삶을 살면 그는 영적으로 부요한 자입니다. 저는 참 힘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일 말씀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입니다. 그것은 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깨어있는 것입니다. 저라고 세상 염려 근심이 왜 없겠습니까? 세상에서 좀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 즐기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에 일어나는 염려와 세상 즐거움에 대한 동경을 그냥 놔 두면 제 마음이 둔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말씀을 보아도 뭔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냥 밋밋한 말씀이고 아무런 반응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메시지를 준비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고문입니다. 그냥 껍데기만 있고 모양만 내는 설교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형식적이 됩니다. 기도를 해도 그냥 냉랭함을 느낍니다. 이런 상태가 금요일까지 가면 한 마디로 절단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이것은 매일 계속되는 싸움이기에 때로는 힘겹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압니다. 이런 싸움을 통해서 주님은 제 마음을 지켜주고 계시다는 것을..
그래서 때로는 무척 염려가 됩니다. 이런 자극과 동기가 별로 없는 성도들은 어떨까하는 것이지요. 마음이 둔해 있지 않을까? 말씀에 대한 반응은 있을까? 이런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만일 주님 오늘 오신다면 흰 세마포를 입고 그 앞에 설 수 있는 성도는 과연 몇이나 될까? 그야말로 제자들이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실 때 보고 ‘유령이다’고 화들짝 놀란 것처럼 놀라는 성도들이 많지는 않을까? 그들이 영적으로 잠자고 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를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잠자고 있는 성도들을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때로는 일어나도록 꼬집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둔한 마음을 기도와 말씀으로 갈아 엎으십시다. 주님 오시는 날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찬양과 경배로 맞이 하는 경성대학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막 8: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8: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8: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8: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8: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8: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혹시 마취를 당해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간혹 간단한 수술을 위해 쓰는 국소 마취제 주사를 맞고 나서 얼얼하고 무감각한 감각이 몇 시간 동안 지속되는 느낌은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닐 것입니다. 보통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는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는 방법이 있지요. 가장 흔한 방법은 눈동자에 빛을 비춰보는 것인데 눈동자가 빛을 받으면 보통 축소되기 때문에 뇌의 이상을 체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지요. 빛에도 눈동자 크기의 반응이 없다면 심각한 뇌손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꼬집어보는 것입니다. 꼬집을 때 반응이 없는 경우도 좀 심각한 상태라고 볼 수 있지요. 즉, 몸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거나 둔감할 때는 뇌의 손상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몸의 반응이 둔하다면 문제가 있지요.
또 알아듣는 것이 느릴 때 우리는 둔하다는 말을 흔히 쓰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오래전 유머 중에 사오정 시리즈가 유행했는데 그 중 하나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지요. 한 번은 선생님이 수업 중에 필기하지 않고 딴 짓하는 사오정을 보고 호통을 칩니다.
선생님 : 야, 거기 맨 뒤! 너 필기 안 하고 뭐하고 있어?
사오정 : 칠판이 안 보여서요.
선생님 : 그래? 네 눈이 몇인데?
사오정 : 제 눈은 두 개인데요
선생님 : 아니 그거 말고, 네 눈이 얼마냐고?
사오정 : 제 눈은 돈 받고 파는 게 아닌데요.
선생님 : 야, 그게 아니고 눈이 얼마나 나쁘냐고?
사오정 : 제 눈은 뭐.....나쁘고 착하고 그런 거 없는데요.
시력이 얼마인지 0.1인지 0.2인지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사오정을 보고 우리는 참 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시각으로 볼 때 문제는 마음의 둔함입니다. 마음의 둔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할까요? 먼저 막 6장 52절 말씀을 봅니다.
막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라 빈들까지 온 무리들이 굶주린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남은 조각만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거두는 이적을 행하시고 무리를 다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배타고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자신은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지요. 그런데 이른 새벽 무렵 제자들이 세찬 바람 가운데 힘들게 노를 젓는 것을 보시고 바다 위를 걸어 배 가까이 가셨을 때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모두 깜짝 놀라 ‘유령이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하시고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갑자기 잔잔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한 마디로 기절초풍할 할 뻔 했다는 말이지요.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그토록 놀란 이유를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 질량불변의 자연 법칙을 넘어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 에서 중력의 법칙을 넘어 자연 환경을 지배하시는 능력을 보고 기겁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기쁨과 경탄의 놀람이 아닌 극도의 불안과 공포의 놀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놀란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둔하여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지 사흘이 되어 자칫 기진할 것을 보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얼마 전에 동일한 상황에서 배울 수 있었던 믿음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학습결과를 도루묵이라고 하지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의 의미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꾸준한 학습의 결과로 성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말씀을 삶 가운데 응용하는 학습을 통해서 조금씩 자라게 되지요.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마치 동일한 원리를 이용한 다양한 수학 문제들을 풀면서 그 원리나 법칙을 이해하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즉, 원리를 알고 나면 문제들을 살짝 바꾸어도 풀 수가 있게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조그만 다른 문제를 만나면 그만 당황해하기가 일수입니다.
예수님은 이번에 떡 다섯이 아닌 떡 일곱과 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 거두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을 먹이고 흩어 보내신 뒤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신 주님은 트집 잡고 따지는 바리새인들을 만나시게 됩니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자 단호히 거절하신 후 다시 배에 오르셔서 벳새다로 향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의도는 누룩처럼 악영향을 미치는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교훈을 조심하라고 하신 뜻이었는데 제자들은 번지수를 잘못 읽었습니다. 마침 가지고 온 떡이 하나밖에 없었던지라 ‘우리가 떡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그러시는가보다’라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막 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리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열둘입니다.’ 또 물으십니다.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그들이 또 대답합니다. ‘일곱입니다.’
마음이 둔한 제자들의 믿음을 세우시기 위해 예수님은 처음부터 다시 그들의 기억을 되살리시며 깨닫도록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8: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주님은 ‘얼마 전에 내가 베푼 이적들을 금방 까먹어버렸느냐? 그리고 그 이적들을 몇 번씩 보아도 내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느냐? 눈과 귀, 그리고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하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이샤라 빌립보를 가셨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시지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지요.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자신이 고난 받아 죽임을 당하신 후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시지만 베드로가 갑자기 나서서 ‘그리하지 마옵소서.’ 예수님을 만류하다가 냉엄한 책망을 받지요. 제자들은 누구보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으나 예수님을 정확히 몰랐습니다. 영광의 주님은 생각해도 고난의 주님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말씀을 몇 번 해 주셔도 묻기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싫어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둔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42:20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아무 말씀을 안 하신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귀에 거슬리거나 보기 싫은 것은 애써 피하려고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도 내가 보고 싶은 것에, 내가 좋아하는 곳에 빨간 줄을 치고 더럽혀있지만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부분, 내가 싫어하는 부분은 늘 깨끗하게 비어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말씀을 볼 때에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것,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말씀에 더욱 마음을 열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둔해집니다. 이런 상태를 에스겔 선지자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겔 33:31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2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자기가 듣고 싶은 메시지만 듣는 것,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마음이 둔해지는 지름길입니다. 왜 그럴까요? 변화에 대한 저항감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압력을 받게 되면 보통 저항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변화에 대해 겸손하게 마음을 열지 않고 이런 상태를 고집한다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마 13장에서 말씀합니다.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음이 둔해지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굳어져 버리는 것이지요. 이것은 변화 받기 싫어하는 단계를 넘어서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한 번 굳어지면 돌이키기가 어렵습니다. 겨울에 꽁꽁 얼어 굳어진 땅을 갈아엎으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을 때 선지자 예레미야는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게 항복하라고 합니다. 항복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전하지요. 하지만 시드기야는 끝까지 하나님이 바벨론 군대를 물러가게 하실 것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옳고 그름,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비진리인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엡 4장 말씀입니다.
엡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를 마음이 굳어 있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큰 소리를 외쳐도 아무리 흔들어도 꼼짝을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말씀에 대해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오히려 의지적으로 거부하고 불순종하지요. 마음이 굳어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쓸데없는 논쟁만 초래할 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선교하던 중에 이런 사람들의 만나자 그들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행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마음이 둔해지는 것은 그나마 살아있긴 한데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 상태를 방임하면 마음이 굳어지기 쉽습니다. 의지적으로 말씀을 저항하게 되는 것이지요. 만일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반드시 징계하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마음이 굳어진 사람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보통 교회에 나오질 않지요. 만일 저와 여러분이 그래도 교회에 나가겠다는 마음이 들면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둔해진 상태일수 있습니다. 하루 동안 말씀을 보고 싶은 의욕이나 갈망이 없다면, 일주일 내내 성경 한 장 보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면,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자꾸 거슬리는 말이 생간다면,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나지 않는다면, 찬송을 해도 마음이 차갑고 냉랭하다면, 형제자매들이나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조심하십시오. 내 마음이 둔해져 있는 증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경고등이 켜진 상태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갑자기 오지는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올 때가 많고 문제는 그런 상태라 해도 자기는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마음이 둔해지면 위기 상황에도 잘 반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설마 하다가 큰 코 다치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둔해지는 증상 중 하나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 중 다섯 처녀가 설마하면서 등불에 기름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 막상 신랑이 오자 황급히 기름을 사러 갔다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원인이 뭘까요? 예수님은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라고 말씀하십니다. 방탕과 술 취함 같은 쾌락과 염려는 말씀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다가 올 위기에 반응하는 것조차 둔감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말씀합니다.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염려와 향락은 재물과 연관성이 많습니다. 재물이 없으면 염려하기 쉽고 재물이 많으면 향락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난과 궁핍에 대한 염려가 그들을 힘들게 하는 무거운 짐이 되지만 반면 부자에게는 재물을 혹시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어떻게 하면 더 불릴 수가 있을까하는 근심걱정과 더불어 또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길까라는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물질이 많든 적든 간에 물질이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서 주님이 마음 중심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주님이 멀어지면 말씀도 멀어져서 점점 마음에 염려나 쾌락 같은 가시떨기가 자라게 되어 마음은 둔해집니다.
재물은 사람을 속이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재물을 얻을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감사 대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여기기보다 자신의 쾌락과 편안함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쾌락은 어떨까요? 세상의 즐거움을 지나치게 추구하다보면 분별력이 약화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염려와 쾌락은 마치 잡초와 같이 번식력이 강하여 빠른 시간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버립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루 동안에 내가 주로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염려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즐거움에 마음이 빼앗겨 있습니까?
사사시대 때의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태어난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힘이란 특별한 은사를 부여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들릴라라는 이방 여인을 사랑하다가 파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에게 몇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기 위해 조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세 번씩이나 엉뚱한 대답을 함으로 위기를 피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이 주신 그 비밀을 말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날마다 그녀가 재촉하고 조르자 그는 번뇌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그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유혹에 굴복해 버립니다. 나실인으로서 그 힘의 비밀에 머리카락에 있다는 것을 실토하자 들릴라는 삼손이 잠든 틈을 이용해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리고 매복해 있던 블레셋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삼손이 벌떡 일어나서 이전처럼 힘을 써 보려고 했지만 그는 무력해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삿 16: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삼손은 그 결과로 눈을 잃게 되고 끌려가 놋줄에 매여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삼손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경각심을 일으킵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이 둔하여져서 염려나 쾌락에 빠지고 죄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린 상태로 살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사실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하나님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늘 말씀에 민감한 삶을 살면 그는 영적으로 부요한 자입니다. 저는 참 힘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일 말씀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입니다. 그것은 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깨어있는 것입니다. 저라고 세상 염려 근심이 왜 없겠습니까? 세상에서 좀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 즐기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에 일어나는 염려와 세상 즐거움에 대한 동경을 그냥 놔 두면 제 마음이 둔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말씀을 보아도 뭔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냥 밋밋한 말씀이고 아무런 반응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메시지를 준비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고문입니다. 그냥 껍데기만 있고 모양만 내는 설교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형식적이 됩니다. 기도를 해도 그냥 냉랭함을 느낍니다. 이런 상태가 금요일까지 가면 한 마디로 절단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이것은 매일 계속되는 싸움이기에 때로는 힘겹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압니다. 이런 싸움을 통해서 주님은 제 마음을 지켜주고 계시다는 것을..
그래서 때로는 무척 염려가 됩니다. 이런 자극과 동기가 별로 없는 성도들은 어떨까하는 것이지요. 마음이 둔해 있지 않을까? 말씀에 대한 반응은 있을까? 이런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만일 주님 오늘 오신다면 흰 세마포를 입고 그 앞에 설 수 있는 성도는 과연 몇이나 될까? 그야말로 제자들이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실 때 보고 ‘유령이다’고 화들짝 놀란 것처럼 놀라는 성도들이 많지는 않을까? 그들이 영적으로 잠자고 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를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잠자고 있는 성도들을 흔들어 깨우는 것입니다. 때로는 일어나도록 꼬집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둔한 마음을 기도와 말씀으로 갈아 엎으십시다. 주님 오시는 날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찬양과 경배로 맞이 하는 경성대학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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