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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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1-03-09 09:51 조회3,918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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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돌아오라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최근에 제가 비슷한 주제의 내용으로 연속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렇습니다. 오늘의 제목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입니다. 돌아간다는 말 속에 함축된 의미는 아주 다양합니다. 무엇보다 돌아간다는 말은 처음 출발점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출발점은 종종 중요한 표지의 역할을 하지요. 혹시 목표를 벗어나게 될 때 어디서 벗어났는지를 알게 하고 방향을 수정할 수 있게 합니다. 혹시 산길을 잃어버려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런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사시는 곳 근처 산에 한참동안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는데 이상하게 올라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처음 간 길이기도 했고 더구나 가다가 몇 번씩이나 갈림길이 있었기에 분명히 어디에선가 잘못 들어선 것이 분명했습니다. 산속에서 물어볼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었던 방법은 다시 올라가는 것이었죠. 어디까지요? 올라갈 때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지점까지 말입니다. 드디어 눈에 익은 갈림길을 찾았고 그 지점에서 조금 전에 내려갔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해서 내려가다 보니 드디어 올바른 길을 찾게 되었지요. 우리 인생도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계속 전진하기보다 출발선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초심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흔히 쓰지요. 이 말은 처음 시작할 때의 순수한 열정을 회복하자는 뜻도 있지만 벗어난 방향성을 회복하자는 뜻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내가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한번은 알프스 눈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있었는데 하얀 눈만 쳐다보고 앞으로 계속 걸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제 자리에 와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는 분명히 직선으로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았던 셈이지요. 어떻게 보면 이처럼 인생은 돌고 도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났던 길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거의 비슷합니다. 대부분 쾌락과 안정된 삶과 명예를 쫒아가지요. 전도서 저자는 인생들의 하는 일이 마치 바람을 잡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뭔가 손에 잡은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결국 손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이죠. 뭔가 이룬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흔적조차도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시편에서 말씀합니다.
시 146: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이 땅은 우리가 잠시 머무를 여관과 같은 곳이며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예비하신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궁극적인 돌아감,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아닙니다. 누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에서부터 부지런히 돌아가는 삶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삶이지요.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면 회복이 필요합니다. 회복은 관계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호세아 6장 1절에서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서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통일왕국의 솔로몬 사후 어수선한 틈을 타 BC 931년 경 독립한 북이스라엘은 초대왕 여로보암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총 19명의 왕이 재위에 올랐는데 통치 기간인 209년 동안 쿠데타로 9번씩이나 왕조가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대부분 왕이 살해되었으며 경건한 왕이 한 명도 없는 그런 비운의 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 시대 때의 북 이스라엘 왕국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그는 41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최장기 집권자였고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성기를 누린 왕이었습니다. 그는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여 원래 이스라엘의 영토였던 곳을 모조리 차지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영토 확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의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오랫동안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아람 왕국이 약해졌고 더구나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 역시 내부적인 문제로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태라 힘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 때 기회를 엿보던 여로보암 2세는 틈을 놓치지 않고 과거 잃었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습니다. 영토가 넓어지니까 국가적 위상도 높아졌고 넓은 영토에서 걷힌 세금과 자원들을 활용하여 무역을 활성화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나라의 경제가 윤택해지면서 부와 힘을 동시에 갖춘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여로보암 2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왕하 14: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하나님의 은혜로 여로보암 2세 시대는 경제적인 번영과 안정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번영과 영적인 부흥은 비례할까요? 아쉽게도 역사적으로 보면 정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초기에 영적인 각성이 경제적인 번영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인 번영은 오히려 영적인 쇠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왕국은 여로보암 2세 치세하에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지만 영적 상태는 그야말로 바닥이었습니다. 왕하 14장에서 말씀합니다.
왕하 14:23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14: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로보암 2세는 초대왕 여로보암 1세가 저지른 우상 숭배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의 죄를 똑같이 답습했습니다. 백성들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 아무리 세상에서 화려한 업적이나 치적을 남기면 뭘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삶은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여로보암2세 시대처럼 경제적인 번영 속에 찾아오고 있는 영적인 쇠락과 빈곤이지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오늘날과 같이 편리하고 잘 사는 나라가 되리라 상상을 못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어릴 때 살던 시골집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초가집이었고 전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조그만 그릇에 심지를 넣어 불을 밝힌 초롱불아래에서 살았습니다. 밤길을 갈 때면 달빛이 등불이 되었습니다. 제일 불편한 것은 화장실이었습니다.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그냥 나무를 걸쳐놓은 화장실이어서 디디고 올라갈 때마다 밑으로 빠질까 두려워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더구나 집 밖에 있고 안에 조명도 없었기 때문에 저녁이면 어두컴컴하고 음산하여 귀신이 많이 나온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습니다. 문도 없어서 인기척이라도 나면 일부러 헛기침을 해야 했지요. 불과 반세기만에 오늘날처럼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우리의 자녀들은 이런 이야기가 상상조차 잘 안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경제 부흥 이면에 영적 부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대학 다니던 70년대와 80년대는 각 교회마다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각 대학의 캠퍼스마다 전도의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벤치에 앉아 있는 아무 학생에게 전도하려고 다가가면 웬만한 일이 아니고는 들어주었습니다. 때로는 버스 안에서 복음을 외쳐도 욕하거나 시끄럽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희들은 이런 식의 전도 방법을 미국 선교사들의 말을 따라 ‘콜드 터키’식 전도라고 불렀습니다. ‘콜드 터키’라는 말은 당시에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사용했는데 나중에 보니 담배, 마약의 중독을 치료할 때 서서히 단계적으로 끊는 것이 아니라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더군요. 마약을 갑자기 끊게 되면 금단증상으로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온몸에 닭살이 돋는데 이 모습이 냉동 칠면조 같다고 해서 '콜드 터키'라고 불렀답니다. 전도하면서 왜 그런 용어를 사용했는지 다소 의아한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관계를 맺고 전도하는 것보다 전혀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전도하는 방법이 훨씬 잘 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나서 믿을지 안 믿을지 마치 단 칼에 그 자리에서 결정하도록 도전을 한 것이지요. 요사이 그렇게 하면 누가 듣겠으며 자칫 뺨을 갈길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당시에는 그런 방법도 통할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이 말씀에 열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발전도 일어났지요. 그런데 오늘날은 어떨까요? 경제적인 풍요와 영적인 상황은 전혀 거꾸로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시대상황과 닮아가는 점이 있어 보입니다. 바로 경제 부흥과 영적인 삶의 나태와 타락의 공존입니다. 만일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까요? 이스라엘의 결말을 보면 예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우리에게 경계가 되는 역사적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잘 나가던 여로보암 2세가 41년 통치 후에 죽고 나자 6명의 왕이 뒤를 잇는데 불과 30여년 만에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패망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한 역사적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에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나, 아모스 그리고 호세아입니다. 특별히 호세아 선지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하셨는데 문제는 고멜이 바람기가 많은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자녀 셋을 낳고도 끊임없이 집을 나가서 외도를 했습니다. 보통 같으면 당장 이혼할 터인데 하나님은 호세아가 고멜을 용서하고 다시 집으로 데려와 살게 하십니다. 그것도 비싼 값을 치르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계속적인 우상숭배를 통한 영적 음행을 저지르고 타락의 길로 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호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반항하는 자식을 돌이키도록 찢고 치십니다. 그런 상처를 주시는 것은 우리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불붙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돌이키고 싶으신 것입니다. 돌아오면 도로 낫게 하시고 상처를 싸매어 주십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을 무척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보다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차를 몰고 갈 때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안다면 돌려야 합니다. 핸들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외에 우리의 마음과 애정을 쏟던 것들이 있다면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모든 축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많은 축복을 받으면 그 축복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호 13장에서 말씀하십니다.
호 13:6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한 마디로 배가 부르니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배를 부르게 했지요? 내가 잘 해서, 내 힘으로 얻은 것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먹여 주셔서 배가 불렀다고 말씀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호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먹을 것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위해 쓴 은과 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정말 억장이 무너질 일이지요. 만일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번영했다면, 그리고 지금도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잊는다면 내 자신이 교만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 질문에 아멘이라고 대답하지 못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고 최소 하루 한 번이라도 감사하고 계십니까? 아마 이 대답에 모두 아멘이라고는 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출근하는 길에 제게 주신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이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건강도, 가족도, 일할 수 있는 기회도, 물질도, 차도...이 모든 것 다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고백하는 습관을 가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런 고백을 드리면서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낮아짐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 아니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것입니다. 알고 있어도 기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잊으면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1, 2절입니다.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맞은 상처를 싸매어주시고 치료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틀 후에 살리시며 3일 째에 일으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혹자는 이틀, 삼일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관을 짓지만 사실은 빨리 회복시켜주신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돌아가기만 하면 기다리셨다는 듯이 속히 회복시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3절입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우리가 잘못을 회개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회개에만 머물러서는 곤란합니다. 다음에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라는 것입니다. 회개에 그치지 말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여기서 ‘힘써’라는 단어는 흥미 있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라다프’라는 단어인데 ‘추적하다’는 뜻입니다. 원수나 범인을 추격할 때 쓰는 말이지요. 이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은 시 23편 6절입니다.
시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서 따른다는 말이 ‘라다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끝까지 추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든든한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저희가 어디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맹렬히 추격하듯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사랑이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라고 할 때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돌아간다는 것은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한 집에 살고 가까이 있어도 사이가 천리만리가 있는 부부도 있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마치 꼭 붙어있는 것처럼 가까운 연인도 있습니다. 미국 한인교회를 목회하셨던 손인식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은퇴하기 몇 년 전에 성도들과 남미 선교를 갔는데 그곳에는 한국에서 온 한 선교사님이 20년이 넘게 인디오 원주민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해 많은 원주민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첫날 현지에 도착한 일행은 그곳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매주일 아침 10시에 예배를 드리는데 몇 주 전, 높은 산악지대에서 오는 20여명 원주민들이 예배가 끝나는 시간에 나타나는 바람에 선교사님이 좀 야단을 쳤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연장자가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걸어오는데 시간이 보통 8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오전 10시에 예배를 드리려면 새벽 2시에 출발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전날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다리가 떠내려가 할 수 없이 돌아서 오느라고 늦었다면서 다시는 늦지 않겠다고 말했답니다. 목사님이 선교사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찔해져 의자에 주저앉았습니다. ‘누가 누구를 야단치는가? 누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가? 교회 옆에 사는 우리가 거리가 가깝다고 하나님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모두 마음이 깨어졌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 준다면서 비행기를 타고 온 모든 일행은 이 이야기를 듣고 다 주저앉아 땅을 치고 울었습니다. 교만과 편견과 자부심 등 쓸데없는 것들로 가득차서 사실 주님께 가장 멀어져 있었던 자신을 보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 여로보암 2세 시대를 닮아가는 오늘날 우리가 새겨야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마음을 회개하면서 이 시간 고백 드리면 좋겠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심지어 제가 잘못 사용한 것조차도 주님이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힘써 알겠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추격하시는 것처럼 나를 지키시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더욱 힘써 알겠습니다. 고백하며 이 시간 각자 기도드리시겠습니다.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최근에 제가 비슷한 주제의 내용으로 연속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렇습니다. 오늘의 제목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입니다. 돌아간다는 말 속에 함축된 의미는 아주 다양합니다. 무엇보다 돌아간다는 말은 처음 출발점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출발점은 종종 중요한 표지의 역할을 하지요. 혹시 목표를 벗어나게 될 때 어디서 벗어났는지를 알게 하고 방향을 수정할 수 있게 합니다. 혹시 산길을 잃어버려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런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께서 사시는 곳 근처 산에 한참동안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는데 이상하게 올라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처음 간 길이기도 했고 더구나 가다가 몇 번씩이나 갈림길이 있었기에 분명히 어디에선가 잘못 들어선 것이 분명했습니다. 산속에서 물어볼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었던 방법은 다시 올라가는 것이었죠. 어디까지요? 올라갈 때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지점까지 말입니다. 드디어 눈에 익은 갈림길을 찾았고 그 지점에서 조금 전에 내려갔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해서 내려가다 보니 드디어 올바른 길을 찾게 되었지요. 우리 인생도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계속 전진하기보다 출발선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초심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흔히 쓰지요. 이 말은 처음 시작할 때의 순수한 열정을 회복하자는 뜻도 있지만 벗어난 방향성을 회복하자는 뜻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내가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한번은 알프스 눈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있었는데 하얀 눈만 쳐다보고 앞으로 계속 걸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제 자리에 와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는 분명히 직선으로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았던 셈이지요. 어떻게 보면 이처럼 인생은 돌고 도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났던 길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거의 비슷합니다. 대부분 쾌락과 안정된 삶과 명예를 쫒아가지요. 전도서 저자는 인생들의 하는 일이 마치 바람을 잡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뭔가 손에 잡은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결국 손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이죠. 뭔가 이룬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흔적조차도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시편에서 말씀합니다.
시 146: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이 땅은 우리가 잠시 머무를 여관과 같은 곳이며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예비하신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궁극적인 돌아감,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아닙니다. 누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에서부터 부지런히 돌아가는 삶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삶이지요.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면 회복이 필요합니다. 회복은 관계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호세아 6장 1절에서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서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통일왕국의 솔로몬 사후 어수선한 틈을 타 BC 931년 경 독립한 북이스라엘은 초대왕 여로보암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총 19명의 왕이 재위에 올랐는데 통치 기간인 209년 동안 쿠데타로 9번씩이나 왕조가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대부분 왕이 살해되었으며 경건한 왕이 한 명도 없는 그런 비운의 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 시대 때의 북 이스라엘 왕국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그는 41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최장기 집권자였고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성기를 누린 왕이었습니다. 그는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여 원래 이스라엘의 영토였던 곳을 모조리 차지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영토 확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의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오랫동안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아람 왕국이 약해졌고 더구나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 역시 내부적인 문제로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태라 힘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 때 기회를 엿보던 여로보암 2세는 틈을 놓치지 않고 과거 잃었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습니다. 영토가 넓어지니까 국가적 위상도 높아졌고 넓은 영토에서 걷힌 세금과 자원들을 활용하여 무역을 활성화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나라의 경제가 윤택해지면서 부와 힘을 동시에 갖춘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여로보암 2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왕하 14: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하나님의 은혜로 여로보암 2세 시대는 경제적인 번영과 안정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번영과 영적인 부흥은 비례할까요? 아쉽게도 역사적으로 보면 정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초기에 영적인 각성이 경제적인 번영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인 번영은 오히려 영적인 쇠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왕국은 여로보암 2세 치세하에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지만 영적 상태는 그야말로 바닥이었습니다. 왕하 14장에서 말씀합니다.
왕하 14:23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14: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로보암 2세는 초대왕 여로보암 1세가 저지른 우상 숭배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의 죄를 똑같이 답습했습니다. 백성들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 아무리 세상에서 화려한 업적이나 치적을 남기면 뭘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삶은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여로보암2세 시대처럼 경제적인 번영 속에 찾아오고 있는 영적인 쇠락과 빈곤이지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오늘날과 같이 편리하고 잘 사는 나라가 되리라 상상을 못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어릴 때 살던 시골집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초가집이었고 전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조그만 그릇에 심지를 넣어 불을 밝힌 초롱불아래에서 살았습니다. 밤길을 갈 때면 달빛이 등불이 되었습니다. 제일 불편한 것은 화장실이었습니다.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그냥 나무를 걸쳐놓은 화장실이어서 디디고 올라갈 때마다 밑으로 빠질까 두려워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더구나 집 밖에 있고 안에 조명도 없었기 때문에 저녁이면 어두컴컴하고 음산하여 귀신이 많이 나온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습니다. 문도 없어서 인기척이라도 나면 일부러 헛기침을 해야 했지요. 불과 반세기만에 오늘날처럼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우리의 자녀들은 이런 이야기가 상상조차 잘 안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경제 부흥 이면에 영적 부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대학 다니던 70년대와 80년대는 각 교회마다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각 대학의 캠퍼스마다 전도의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벤치에 앉아 있는 아무 학생에게 전도하려고 다가가면 웬만한 일이 아니고는 들어주었습니다. 때로는 버스 안에서 복음을 외쳐도 욕하거나 시끄럽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희들은 이런 식의 전도 방법을 미국 선교사들의 말을 따라 ‘콜드 터키’식 전도라고 불렀습니다. ‘콜드 터키’라는 말은 당시에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사용했는데 나중에 보니 담배, 마약의 중독을 치료할 때 서서히 단계적으로 끊는 것이 아니라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더군요. 마약을 갑자기 끊게 되면 금단증상으로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온몸에 닭살이 돋는데 이 모습이 냉동 칠면조 같다고 해서 '콜드 터키'라고 불렀답니다. 전도하면서 왜 그런 용어를 사용했는지 다소 의아한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관계를 맺고 전도하는 것보다 전혀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전도하는 방법이 훨씬 잘 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나서 믿을지 안 믿을지 마치 단 칼에 그 자리에서 결정하도록 도전을 한 것이지요. 요사이 그렇게 하면 누가 듣겠으며 자칫 뺨을 갈길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당시에는 그런 방법도 통할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이 말씀에 열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발전도 일어났지요. 그런데 오늘날은 어떨까요? 경제적인 풍요와 영적인 상황은 전혀 거꾸로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시대상황과 닮아가는 점이 있어 보입니다. 바로 경제 부흥과 영적인 삶의 나태와 타락의 공존입니다. 만일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까요? 이스라엘의 결말을 보면 예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우리에게 경계가 되는 역사적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잘 나가던 여로보암 2세가 41년 통치 후에 죽고 나자 6명의 왕이 뒤를 잇는데 불과 30여년 만에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패망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한 역사적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에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나, 아모스 그리고 호세아입니다. 특별히 호세아 선지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하셨는데 문제는 고멜이 바람기가 많은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자녀 셋을 낳고도 끊임없이 집을 나가서 외도를 했습니다. 보통 같으면 당장 이혼할 터인데 하나님은 호세아가 고멜을 용서하고 다시 집으로 데려와 살게 하십니다. 그것도 비싼 값을 치르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계속적인 우상숭배를 통한 영적 음행을 저지르고 타락의 길로 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호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반항하는 자식을 돌이키도록 찢고 치십니다. 그런 상처를 주시는 것은 우리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불붙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돌이키고 싶으신 것입니다. 돌아오면 도로 낫게 하시고 상처를 싸매어 주십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을 무척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보다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차를 몰고 갈 때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안다면 돌려야 합니다. 핸들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외에 우리의 마음과 애정을 쏟던 것들이 있다면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모든 축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많은 축복을 받으면 그 축복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호 13장에서 말씀하십니다.
호 13:6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한 마디로 배가 부르니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배를 부르게 했지요? 내가 잘 해서, 내 힘으로 얻은 것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먹여 주셔서 배가 불렀다고 말씀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호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먹을 것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위해 쓴 은과 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정말 억장이 무너질 일이지요. 만일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번영했다면, 그리고 지금도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잊는다면 내 자신이 교만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 질문에 아멘이라고 대답하지 못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고 최소 하루 한 번이라도 감사하고 계십니까? 아마 이 대답에 모두 아멘이라고는 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출근하는 길에 제게 주신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이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건강도, 가족도, 일할 수 있는 기회도, 물질도, 차도...이 모든 것 다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고백하는 습관을 가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런 고백을 드리면서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낮아짐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 아니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것입니다. 알고 있어도 기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잊으면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1, 2절입니다.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맞은 상처를 싸매어주시고 치료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틀 후에 살리시며 3일 째에 일으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혹자는 이틀, 삼일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관을 짓지만 사실은 빨리 회복시켜주신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돌아가기만 하면 기다리셨다는 듯이 속히 회복시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3절입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우리가 잘못을 회개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회개에만 머물러서는 곤란합니다. 다음에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라는 것입니다. 회개에 그치지 말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여기서 ‘힘써’라는 단어는 흥미 있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라다프’라는 단어인데 ‘추적하다’는 뜻입니다. 원수나 범인을 추격할 때 쓰는 말이지요. 이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은 시 23편 6절입니다.
시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서 따른다는 말이 ‘라다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끝까지 추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든든한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저희가 어디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맹렬히 추격하듯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사랑이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라고 할 때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돌아간다는 것은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한 집에 살고 가까이 있어도 사이가 천리만리가 있는 부부도 있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마치 꼭 붙어있는 것처럼 가까운 연인도 있습니다. 미국 한인교회를 목회하셨던 손인식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은퇴하기 몇 년 전에 성도들과 남미 선교를 갔는데 그곳에는 한국에서 온 한 선교사님이 20년이 넘게 인디오 원주민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해 많은 원주민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첫날 현지에 도착한 일행은 그곳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매주일 아침 10시에 예배를 드리는데 몇 주 전, 높은 산악지대에서 오는 20여명 원주민들이 예배가 끝나는 시간에 나타나는 바람에 선교사님이 좀 야단을 쳤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연장자가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걸어오는데 시간이 보통 8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오전 10시에 예배를 드리려면 새벽 2시에 출발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전날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다리가 떠내려가 할 수 없이 돌아서 오느라고 늦었다면서 다시는 늦지 않겠다고 말했답니다. 목사님이 선교사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찔해져 의자에 주저앉았습니다. ‘누가 누구를 야단치는가? 누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가? 교회 옆에 사는 우리가 거리가 가깝다고 하나님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모두 마음이 깨어졌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 준다면서 비행기를 타고 온 모든 일행은 이 이야기를 듣고 다 주저앉아 땅을 치고 울었습니다. 교만과 편견과 자부심 등 쓸데없는 것들로 가득차서 사실 주님께 가장 멀어져 있었던 자신을 보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 여로보암 2세 시대를 닮아가는 오늘날 우리가 새겨야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마음을 회개하면서 이 시간 고백 드리면 좋겠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심지어 제가 잘못 사용한 것조차도 주님이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힘써 알겠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추격하시는 것처럼 나를 지키시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더욱 힘써 알겠습니다. 고백하며 이 시간 각자 기도드리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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