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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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8-18 11:43 조회5,33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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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3: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3: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3: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나이가 들면서 우리 몸은 서서히 노화 현상을 겪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몸의 특수 감각 기관인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시각....이 5가지 감각 기관은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30세부터 매년 1% 내외로 기능이 떨어져 결국 노인성 질병이 된다고 합니다. 특별히 청각과 미각은 대부분 50대 후반, 냄새 맡는 후각은 70대 초반부터 스스로 느낄 수 있는 노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요사이 90을 향해 가고 계신 제 어머니께 한 번씩 전화를 드릴 때, 그리고 아내가 100세가 되신 장모님께 전화를 드릴 때 우리도 모르게 목소리가 좀 커질 때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으셨는데 못 알아들으시는 경우들이 종종 생기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소리를 높이다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면 그냥 대충 넘어가기도 하지요. 하나님과의 소통에 있어서도 우리의 청각이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귀 먹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 94:9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사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보면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 함께 떠드는 소리 가운데서 자기 아이의 목소리를 분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굽혀 귀를 기울이시고 심지어 말하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까지 다 아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정말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0: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중동에서 양 치는 목동 한 사람이 수 백 마리의 양떼를 혼자 이끄는 모습을 보면 정말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목동이 무슨 소리를 내면 양들이 일제히 가고 또 다른 소리를 내면 일제히 멈추기도 합니다. 한번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작전 중에 베들레헴 지역을 봉쇄조치하면서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양들을 모두 모아 한 구역 안에 가두어 놓았답니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가 와서 자기들의 양들을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곳을 지키던 군인이 ‘아니 이렇게 섞여있는 많은 양 떼 중에서 당신의 양을 어떻게 찾을 수 있어요’라고 하니까 자기 아들이 오면 찾을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한 번 데리고 와 보라고 했더니 실제 그 아들이 와서 휘파람 같은 무슨 소리를 내자 그 속에 섞여 있는 양들이 한 마리 한 마리씩 빠져나와 모두 목자에게 모이더랍니다. 깜짝 놀란 군인이 그 양들을 돌려주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구별하여 들을 줄 안다면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지 않을까요? 다시 요 10장 27절입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양인 것은 목자인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양인데도 예수님의 음성을 못 알아듣는다면 우리의 청각이나 주의력의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먼저 읽은 본문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경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 젖을 뗀 나이가 되었을 때 한나는 자신이 드린 서원대로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에게 어린 사무엘을 보내어 평생 하나님을 섬기도록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시대는 영적으로 어두운 침체기였습니다. 삼상 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삼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사무엘을 아이라고 지칭하는데 보통 아이는 소년을 가리키며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때 사무엘의 나이를 약 12세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이처럼 어렸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것, 즉 계시를 잘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영적 나태와 타락으로 인해 영적으로 무감각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영적 지도자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문제였는데 아주 행실이 나빴습니다. 그들은 나이 많은 아버지를 도와 거룩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면서 심각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가지고 온 고기를 제사 드리기도 전에 가로채는 일이 다반사였을 뿐 아니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자들, 즉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극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런 소문을 듣고 아들들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느냐, 그리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고 엘리도 더 이상 그들의 죄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어린 사무엘은 법궤가 있는 하나님의 전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삼상 3장 2,3절입니다.
삼상 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엘리는 나이가 많아 생긴 노안으로 인해 앞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그와 동시에 영적인 분별력도 약화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육신의 눈이 나빠지는 동시에 영적인 눈도 멀어져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눈이 나빠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나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나빠지는 경우는 정말 말할 수 없이 슬픈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고후 4장 16절입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바울의 고백처럼 겉 사람은 날로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더욱 새로워지고 있습니까?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가까워지고 있나요? 아니면 더 멀어지고 있나요? 이 시간 이후 다시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속사람이 새로워지시길 축복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을 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동트기 전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는 소리에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고 바로 달려갔지만 엘리는 자기가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다시 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현상이 세 번씩이나 반복되자 엘리는 그제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줄 알고 만일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드리라고 일러 줍니다. 하나님께서 4번 째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 사무엘은 엘리가 시킨 대로 응답했습니다. 삼상 3장 10절입니다.
삼상 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좀 더 다른 방법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여 서서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임하여 서서라는 말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말씀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을 잘 몰랐던 사무엘에게 보다 더 잘 알아듣도록 생생한 방법으로 말씀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안의 죄악을 언급하시며 그 집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엘리에게 전했습니다.
자, 과연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중요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왜 중요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마 7장 24절을 보십시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구절 제일 앞부분에 있는 접속사를 주의해 보십시오.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바로 앞의 내용을 연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불법자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행한 일만 보면 크게 나무랄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했습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쳤을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행하는 것은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듣지 않고 행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믿음이 없이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다음 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행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합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건성이 아니라 잘 들어야 합니다. 먼저 듣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일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5장 24절 말씀을 볼까요?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자세히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음에 뭐라고요? ‘내 말을 듣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지 이 단계를 건너뛰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도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들어야 합니다. 또 계시록 3장 20절을 볼까요?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듣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방법을 나누겠습니다. 삼상 3장 21절입니다.
삼상 3: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보편적이고 흔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매일 성경을 읽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리는데요? 제 귀는 정상인데 음성을 들을 수 없어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을 마치 옆에서 누가 육성으로 말할 때 듣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혹은 들을 때, 혹은 묵상할 때, 혹은 공부할 때, 혹은 암송할 때 이전에는 그저 눈으로 스쳐지나갔는데 어느 한 순간 깨달아질 때가 있습니다. 깨달아진다는 것은 마치 어두운 밤에 등불을 켤 때 길이 환히 보이듯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성경에 기록된 활자의 말씀이 마치 내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갑자기 해답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하신 일이 있으십니까?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16절을 보겠습니다.
행 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얼마 전에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이샤라에 있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후 그곳에서 며칠간 머무른 뒤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도착하자 아직 유대교의 전통에 매여 있던 유대인들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서 함께 식사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이방인과 가까이 교제하는 것을 불법으로 여겼거든요. 그 때 베드로가 차례로 그동안 일어난 일을 해명했습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생각났노라’ 이렇게 어떤 상황 속에서 필요한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가끔 나눈 간증이지만 듣지 못한 분들을 위해 저의 큰 딸 취업 과정에서 배운 교훈을 한 번 더 나누고 싶습니다. 원래 과학 기자가 되고 싶어 했던 딸은 자기가 가고 싶었던 출판사 딱 한 군데에만 입사 원서를 내었습니다. ‘모’ 아니면 ‘또’인 상황에서 그나마 감사하게도 3차까지는 합격했지만 마지막 4차 임원 면접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본인도 그랬겠지만 아빠인 저로서도 마치 제가 떨어진 것처럼 적잖은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교회에서 아침 새벽기도를 하고 있던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제가 의지적으로 떠올린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께서 제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마음에 떠올랐던 것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롬 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 순간 말씀을 묵상하면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떨어져도 다시 붙게 하시겠네.’라는 평소와 다른 감동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즉시 딸에게 ‘하나님께서 너를 다시 합격시켜 주신단다.’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보내고 나서도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한 거지?’라며 제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 믿음과 확신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만나는 형제들에게도 제게 주신 그 말씀과 믿음을 나누었습니다. 결국 교회 성도들이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무슨 꼴이 되지?’라는 걱정도 앞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형제들은 아마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뜻인 것 같다고 애써 이성적으로 좋게 해석해 주었지만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저는 반드시 떨어진 그 직장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말을 하고도 마음이 조마했지요. ‘붙고 안 붙고’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목회자로서 제 신뢰성이 걸린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약 한 달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정말 초조해졌습니다. 마치 시계추와 같이 조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에게 담대히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이 들 때마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로 인해 다시 믿음이 원위치 되었습니다.
롬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주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 마디로 제 자신에게는 믿음의 시련이었죠. 하나님은 말씀을 하나 주시고는 완전히 침묵하시는 것 같았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딱 한 달이 지났을 때 그 회사 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마지막 4차에서 떨어진 사람들 중에서 편집자 한 사람을 뽑을 생각인데 면접보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딸은 다시 면접을 봤고 또 피 말리는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마음속으로는 ‘하나님 아버지 좀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약속을 이루시려면 한 번에 끝내 주셔야지. 이건 또 뭡니까?’란 생각까지 들었지만 또다시 말씀으로 믿음이 원 위치되었습니다. 결국 일주일 후에 최종 합격 연락을 받고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을 했습니다. 말씀을 받은 지 딱 한 달 일주일 만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심과 같이 떨어진 바로 그 회사로 인도해 주셨고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부르시는 것처럼 원래 없던 자리에서 있는 자리까지 만들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한 달이 넘는 기다림을 통해서 제 믿음을 연단하셨고 제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경험한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말씀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믿으며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설교를 듣든지, 성경을 읽든지 공부하든지 암송할 때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 119편 18절입니다.
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이 시간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옵소서. 이번 한 주 동안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게 하소서, 깨달을 때 지체 말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더 알고 경험하게 하소서.”
다음 주에 ‘잘 듣게 하소서’ 2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번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3: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나이가 들면서 우리 몸은 서서히 노화 현상을 겪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몸의 특수 감각 기관인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시각....이 5가지 감각 기관은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30세부터 매년 1% 내외로 기능이 떨어져 결국 노인성 질병이 된다고 합니다. 특별히 청각과 미각은 대부분 50대 후반, 냄새 맡는 후각은 70대 초반부터 스스로 느낄 수 있는 노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요사이 90을 향해 가고 계신 제 어머니께 한 번씩 전화를 드릴 때, 그리고 아내가 100세가 되신 장모님께 전화를 드릴 때 우리도 모르게 목소리가 좀 커질 때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으셨는데 못 알아들으시는 경우들이 종종 생기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소리를 높이다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면 그냥 대충 넘어가기도 하지요. 하나님과의 소통에 있어서도 우리의 청각이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귀 먹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 94:9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사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보면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 함께 떠드는 소리 가운데서 자기 아이의 목소리를 분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굽혀 귀를 기울이시고 심지어 말하기 전에 이미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까지 다 아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정말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0: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중동에서 양 치는 목동 한 사람이 수 백 마리의 양떼를 혼자 이끄는 모습을 보면 정말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목동이 무슨 소리를 내면 양들이 일제히 가고 또 다른 소리를 내면 일제히 멈추기도 합니다. 한번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작전 중에 베들레헴 지역을 봉쇄조치하면서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양들을 모두 모아 한 구역 안에 가두어 놓았답니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가 와서 자기들의 양들을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곳을 지키던 군인이 ‘아니 이렇게 섞여있는 많은 양 떼 중에서 당신의 양을 어떻게 찾을 수 있어요’라고 하니까 자기 아들이 오면 찾을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한 번 데리고 와 보라고 했더니 실제 그 아들이 와서 휘파람 같은 무슨 소리를 내자 그 속에 섞여 있는 양들이 한 마리 한 마리씩 빠져나와 모두 목자에게 모이더랍니다. 깜짝 놀란 군인이 그 양들을 돌려주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구별하여 들을 줄 안다면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지 않을까요? 다시 요 10장 27절입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양인 것은 목자인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양인데도 예수님의 음성을 못 알아듣는다면 우리의 청각이나 주의력의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먼저 읽은 본문 말씀에서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경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 젖을 뗀 나이가 되었을 때 한나는 자신이 드린 서원대로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에게 어린 사무엘을 보내어 평생 하나님을 섬기도록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시대는 영적으로 어두운 침체기였습니다. 삼상 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삼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사무엘을 아이라고 지칭하는데 보통 아이는 소년을 가리키며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때 사무엘의 나이를 약 12세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이처럼 어렸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것, 즉 계시를 잘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영적 나태와 타락으로 인해 영적으로 무감각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영적 지도자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문제였는데 아주 행실이 나빴습니다. 그들은 나이 많은 아버지를 도와 거룩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면서 심각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가지고 온 고기를 제사 드리기도 전에 가로채는 일이 다반사였을 뿐 아니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자들, 즉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극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런 소문을 듣고 아들들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느냐, 그리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고 엘리도 더 이상 그들의 죄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어린 사무엘은 법궤가 있는 하나님의 전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삼상 3장 2,3절입니다.
삼상 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엘리는 나이가 많아 생긴 노안으로 인해 앞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그와 동시에 영적인 분별력도 약화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육신의 눈이 나빠지는 동시에 영적인 눈도 멀어져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눈이 나빠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나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나빠지는 경우는 정말 말할 수 없이 슬픈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고후 4장 16절입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바울의 고백처럼 겉 사람은 날로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더욱 새로워지고 있습니까?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가까워지고 있나요? 아니면 더 멀어지고 있나요? 이 시간 이후 다시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속사람이 새로워지시길 축복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을 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동트기 전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는 소리에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고 바로 달려갔지만 엘리는 자기가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다시 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현상이 세 번씩이나 반복되자 엘리는 그제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줄 알고 만일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드리라고 일러 줍니다. 하나님께서 4번 째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 사무엘은 엘리가 시킨 대로 응답했습니다. 삼상 3장 10절입니다.
삼상 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좀 더 다른 방법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여 서서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임하여 서서라는 말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말씀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을 잘 몰랐던 사무엘에게 보다 더 잘 알아듣도록 생생한 방법으로 말씀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안의 죄악을 언급하시며 그 집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엘리에게 전했습니다.
자, 과연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중요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왜 중요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마 7장 24절을 보십시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구절 제일 앞부분에 있는 접속사를 주의해 보십시오.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바로 앞의 내용을 연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불법자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행한 일만 보면 크게 나무랄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했습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쳤을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행하는 것은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듣지 않고 행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믿음이 없이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다음 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행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합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건성이 아니라 잘 들어야 합니다. 먼저 듣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일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5장 24절 말씀을 볼까요?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자세히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음에 뭐라고요? ‘내 말을 듣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지 이 단계를 건너뛰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도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들어야 합니다. 또 계시록 3장 20절을 볼까요?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듣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방법을 나누겠습니다. 삼상 3장 21절입니다.
삼상 3: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보편적이고 흔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매일 성경을 읽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리는데요? 제 귀는 정상인데 음성을 들을 수 없어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을 마치 옆에서 누가 육성으로 말할 때 듣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혹은 들을 때, 혹은 묵상할 때, 혹은 공부할 때, 혹은 암송할 때 이전에는 그저 눈으로 스쳐지나갔는데 어느 한 순간 깨달아질 때가 있습니다. 깨달아진다는 것은 마치 어두운 밤에 등불을 켤 때 길이 환히 보이듯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성경에 기록된 활자의 말씀이 마치 내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갑자기 해답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하신 일이 있으십니까?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16절을 보겠습니다.
행 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얼마 전에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이샤라에 있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후 그곳에서 며칠간 머무른 뒤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도착하자 아직 유대교의 전통에 매여 있던 유대인들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서 함께 식사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이방인과 가까이 교제하는 것을 불법으로 여겼거든요. 그 때 베드로가 차례로 그동안 일어난 일을 해명했습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생각났노라’ 이렇게 어떤 상황 속에서 필요한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가끔 나눈 간증이지만 듣지 못한 분들을 위해 저의 큰 딸 취업 과정에서 배운 교훈을 한 번 더 나누고 싶습니다. 원래 과학 기자가 되고 싶어 했던 딸은 자기가 가고 싶었던 출판사 딱 한 군데에만 입사 원서를 내었습니다. ‘모’ 아니면 ‘또’인 상황에서 그나마 감사하게도 3차까지는 합격했지만 마지막 4차 임원 면접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본인도 그랬겠지만 아빠인 저로서도 마치 제가 떨어진 것처럼 적잖은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교회에서 아침 새벽기도를 하고 있던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제가 의지적으로 떠올린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께서 제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마음에 떠올랐던 것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롬 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 순간 말씀을 묵상하면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떨어져도 다시 붙게 하시겠네.’라는 평소와 다른 감동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즉시 딸에게 ‘하나님께서 너를 다시 합격시켜 주신단다.’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보내고 나서도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한 거지?’라며 제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 믿음과 확신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만나는 형제들에게도 제게 주신 그 말씀과 믿음을 나누었습니다. 결국 교회 성도들이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무슨 꼴이 되지?’라는 걱정도 앞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형제들은 아마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뜻인 것 같다고 애써 이성적으로 좋게 해석해 주었지만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저는 반드시 떨어진 그 직장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말을 하고도 마음이 조마했지요. ‘붙고 안 붙고’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목회자로서 제 신뢰성이 걸린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약 한 달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정말 초조해졌습니다. 마치 시계추와 같이 조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성도들에게 담대히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이 들 때마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로 인해 다시 믿음이 원위치 되었습니다.
롬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주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 마디로 제 자신에게는 믿음의 시련이었죠. 하나님은 말씀을 하나 주시고는 완전히 침묵하시는 것 같았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딱 한 달이 지났을 때 그 회사 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마지막 4차에서 떨어진 사람들 중에서 편집자 한 사람을 뽑을 생각인데 면접보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딸은 다시 면접을 봤고 또 피 말리는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마음속으로는 ‘하나님 아버지 좀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약속을 이루시려면 한 번에 끝내 주셔야지. 이건 또 뭡니까?’란 생각까지 들었지만 또다시 말씀으로 믿음이 원 위치되었습니다. 결국 일주일 후에 최종 합격 연락을 받고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을 했습니다. 말씀을 받은 지 딱 한 달 일주일 만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심과 같이 떨어진 바로 그 회사로 인도해 주셨고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부르시는 것처럼 원래 없던 자리에서 있는 자리까지 만들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한 달이 넘는 기다림을 통해서 제 믿음을 연단하셨고 제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경험한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말씀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믿으며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설교를 듣든지, 성경을 읽든지 공부하든지 암송할 때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 119편 18절입니다.
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이 시간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옵소서. 이번 한 주 동안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게 하소서, 깨달을 때 지체 말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더 알고 경험하게 하소서.”
다음 주에 ‘잘 듣게 하소서’ 2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번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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