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누리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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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5-04 07:11 조회7,078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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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29:5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29:6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랜 전 군대 입대하여 10주간 군사 훈련을 받던 중 50Km 왕복 행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바람이 매섭게 불고 꽁꽁 얼다시피 한 겨울인 1월에 총을 메고 완전 군장을 한 상태라 참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올 때는 양쪽 발에 물집이 다 생겨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걸을 때마다 오는 쓰라린 통증을 꾹 참고 절뚝거리며 마지막까지 완주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제가 편성된 훈련반이 훈련 초기에 50Km 행군이 배정된 바람에 일찍 힘든 과정을 겪고 나니 남은 훈련은 그렇게 힘들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초기에 힘든 과정을 겪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자신감이 생겼다는 의미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아주 힘든 광야를 한 번 통과하고 나면 웬만한 일은 크게 어렵지 않게 극복하게 되는 것이지요. 광야의 길을 통해 연단된 사람들은 인생의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비록 큰 시련이 와도 당장 겪는 현실적인 고통 속에 함몰되기보다 미래의 소망에 점차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사람들의 위로를 기대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의지하며 위로와 힘을 얻게 되고요. 그리고 그 시련 후에는 망가진 모습이 아니라 더 성숙되고 연단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광야는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케 하셔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훈련장입니다. 지난주는 이 주제를 중심으로 광야의 영성을 회복하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광야에서 누리는 은혜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출애굽 2세대를 대상으로 행한 설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 1세대는 광야 생활 초기에 당시 20세 이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로 광야 생활을 40년 동안 하는 동안에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출애굽 2세대는 광야에서 출생한 사람들로부터 60세까지였으며 그 중 고령층은 출애굽하기 전에 애굽에서 일어난 열 가지 재앙과 출애굽한 직 후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놀라운 일을 직접 목도했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먼저 말씀합니다.
신 29: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29: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광야에서 보고 경험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광야에서 특별히 경험하게 되는 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40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셨지만 너희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신이 해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를 키우다보면 먹는 것 외에 특별히 신경 쓰는 것 중 하나가 옷과 신발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기본적인 필요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는 동안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모두 채워주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광야에서 베푸신 은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광야를 통과해야 할 넓은 땅으로 가정하고 거치게 되는 정거장을 몇 군데 가정해서 생각해 볼까 합니다.
첫 번째 정거장은 ‘마라’라는 정거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온 뒤 3일 길을 걸었지만 물을 얻지 못하다가 마라라는 곳에 도착해서 드디어 고대하던 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물을 마셔보니 맛이 써서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당장 불평이 모세에게 쏟아졌습니다. ‘우리가 이 광야에서 무엇을 마신단 말입니까?’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마자 물맛이 쓴맛에서 단맛으로 변하여 마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간혹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물이 없다고 그렇게 불평할까, 참 믿음이 없고 수준이하의 사람들이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도 다를 바 없는 존재들입니다. 어떤 급한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부르짖다가 해결이 되면 금방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문제를 만나면 또 염려하고 고민하며 불평합니다. 광야 속에서 광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삶의 특징은 불평입니다. 불평을 자꾸 늘어놓는 어떤 부인을 보고 그 남편에게 한 사람이 혹시 당신 부인이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있다고 하자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죠. 남편은 자기 아내가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어떤 제조업에 종사하는지 물으니 불평 제조업이라고 하더랍니다. 매일 매시간 불평만 쏟아놓는다는 말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광야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나쁜 직업은 불평 제조업입니다. 만약 그 불평을 감사로 바꾸지 않는 한 광야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감사는 선택이고 습관입니다. 광야 생활을 성공적으로 거치는 한 가지 비결 중 하나는 감사입니다. 어떤 궁핍에도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며 감사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고백합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어떤 일에도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가 영적으로 배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마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은혜는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는 은혜였습니다. 모세가 나무를 물에 던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을 때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그 나무가 무슨 약효가 있었을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순종을 통해 쓴 환경 속에서도 단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놓습니다.
두 번째 광야 생활을 행하며 거친 정거장은 ‘신 광야’ 정거장입니다.
그들이 출애굽한 후 한 달 보름이 지났을 때 신 광야에 이르게 됩니다. 그 때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또 다시 원망과 불평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에서 싸 왔던 양식이 바닥이 나자 그들은 애굽 시절 고기 가마 곁에 앉아서 먹던 때를 그리워하며 ‘차라리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죽여주셨더라면 이곳 광야까지 나와서 굶어 죽지는 않을 텐데’라고 원망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대한 원망이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원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야기 합니다.
출 16:8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원망하는 소리를....그 방향이 어떤 사람을 향하는 원망이든 하나님은 자신을 향한 원망이심을 아십니다. 우리는 종종 말을 할 때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의식 없이 함부로 말을 뱉기가 쉽습니다. 어떤 경우는 ‘차라리 죽고 싶다’란 극단적인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민수기 14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간 열 두 명의 정탐꾼 중 열 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 땅을 절대 점령할 수 없다. 그곳에는 너무 크고 강한 족속이 있고 성벽도 너무 튼튼해서 우리가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올라가서 취하면 된다.’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온 백성들이 그 부정적인 뉴스에 감염이 되어 함께 통곡을 하면서 아론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애굽에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20세 이상 성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 못한 채 광야가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뱉은 말은 모두 하나님께 대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살 시위를 떠난 화살과 쏟아진 물과 한 번 뱉은 말은 결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무심코 던진 3초의 말이 30년간의 상처를 만드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조심해야 합니다. 말할 때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말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지만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듭된 원망에도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저녁에는 고기거리로 메추라기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에 특징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이슬이 마를 때에 진 주위에 내렸다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면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거둘 양식은 하루 먹을 양식뿐이었습니다. 내일을 위해 남겨둔 사람들은 다음 날 보니 상해서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겨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만나는 사재기를 할 수가 없는 양식이었습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 때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었지만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어떤 지역에서는 사재기 현상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사재기는 불안함의 표현입니다.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만나는 매일의 양식이어야 했습니다. 만나를 매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은 매일 하나님의 공급을 기대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양식 주시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시지 않을까라고 걱정한다면 사재기에 대한 유혹이 생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매일 읽는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의 은혜로 일주일을 산다고 말합니다. 물론 전혀 틀린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지만 냉정하게 보면 부적절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먹은 말씀이 일주일 양식으로, 한 달 전 먹은 말씀을 일 년 양식으로 삼는다면 금방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매일 일정량을 규칙적으로 먹는 사람이 건강한 법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아침에 거두어야 했습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기 시작하면 그것은 녹아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 일찍 조용한 가운데 먹는 말씀과 해가 다 뜨고 주위가 산만한 가운데 먹는 말씀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말씀의 질이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태도와 소화하는 환경에 차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매일의 초자연적인 음식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매일 말씀을 통한 생명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광야생활을 잘 감당해 나가도록 힘과 능력을 줄 것입니다. 이것이 만나의 은혜입니다. 아이러니하게 광야생활 중에 있다 보면 오히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만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만나는 우리의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르비딤의 은혜입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두 가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한 가지는 마실 물이 없어 백성들이 또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하자 물이 반석에서 솟아났지요. 목마름을 채워주신 은혜를 누리는 것도 잠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기치 않은 외부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아말렉 족속들이 쳐 들어온 것이지요. 이 때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나가 싸우도록 하고 자신은 아론과 훌과 같이 전쟁터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지팡이를 높이 들었습니다. 신기한 사실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피곤해서 손을 내리면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론과 훌이 모세를 돌에 앉히고 자신들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이 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 올렸습니다. 결국 해가 지도록 그 손이 내려오지 않았고 결국 여호수아가 칼로 아말렉을 무찔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의 승리라고 믿습니다. 지상에서 싸운 여호수아가 중요할까요, 아니면 산꼭대기에서 손을 든 모세가 중요할까요? 분명한 것은 둘 다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무시하고 기도에만 매달려 살아서는 곤란합니다. 중요한 것은 승패가 산꼭대기에서 결정이 났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승리...이것이 광야에서 누리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어떻게 하면 누릴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란 구절입니다. 승리를 확인할 때까지 손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에서 승리하게 한 기도의 진수입니다. 해가 지도록... 승리가 확인될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것이 우리가 광야에서 위기를 만날 때 드리게 되는 기도입니다. 광야에 있는 것만 해도 힘든데 그 속에서 위기를 만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설상가상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기도의 무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를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하고 난 뒤 기도내용을 다음 기도할 때까지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응답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할 위기에 처할 때 드리는 기도는 다릅니다. 끈질긴 기도, 응답될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않는 기도를 통해 얻게 되는 승리가 바로 광야에서 누리게 되는 은혜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도는 간절하고 집요합니까? 해가 지도록, 응답될 때까지 수시로 기도하시겠습니까?
사실 통과해야 할 광야의 은혜 정거장을 6 곳으로 잡았습니다. 이제까지 3군데를 들렸으니 아직도 3곳이 남았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설교를 위해 남겨두겠습니다. 우리 모두 광야를 거치는 동안 마라의 정거장에서 불평을 감사로 바꾸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신 광야 정거장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만나의 은혜를 날마다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르비딤 정거장에서 해가 지도록 기도한 모세와 아론과 훌의 기도처럼 광야에서 기도의 승리를 경험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각자 잠시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경험했던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은혜, 매일 내려주신 만나의 은혜, 해가 지도록 중단하지 않았던 기도를 통한 승리의 은혜를 들으시면서 떠오르시는 한 분이 계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은 쓴물을 단물이 되게 하셨듯이 손 씻는 용도의 맹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만나가 되십니다. 또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중보자가 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승리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메마른 광야를 걷는다 해도 예수님이 동행하시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능히 광야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 같이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광야 속에서 내려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도록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드리시겠습니다.
29:6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랜 전 군대 입대하여 10주간 군사 훈련을 받던 중 50Km 왕복 행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바람이 매섭게 불고 꽁꽁 얼다시피 한 겨울인 1월에 총을 메고 완전 군장을 한 상태라 참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올 때는 양쪽 발에 물집이 다 생겨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걸을 때마다 오는 쓰라린 통증을 꾹 참고 절뚝거리며 마지막까지 완주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제가 편성된 훈련반이 훈련 초기에 50Km 행군이 배정된 바람에 일찍 힘든 과정을 겪고 나니 남은 훈련은 그렇게 힘들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초기에 힘든 과정을 겪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자신감이 생겼다는 의미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아주 힘든 광야를 한 번 통과하고 나면 웬만한 일은 크게 어렵지 않게 극복하게 되는 것이지요. 광야의 길을 통해 연단된 사람들은 인생의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비록 큰 시련이 와도 당장 겪는 현실적인 고통 속에 함몰되기보다 미래의 소망에 점차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사람들의 위로를 기대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의지하며 위로와 힘을 얻게 되고요. 그리고 그 시련 후에는 망가진 모습이 아니라 더 성숙되고 연단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광야는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케 하셔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훈련장입니다. 지난주는 이 주제를 중심으로 광야의 영성을 회복하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광야에서 누리는 은혜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출애굽 2세대를 대상으로 행한 설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 1세대는 광야 생활 초기에 당시 20세 이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로 광야 생활을 40년 동안 하는 동안에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출애굽 2세대는 광야에서 출생한 사람들로부터 60세까지였으며 그 중 고령층은 출애굽하기 전에 애굽에서 일어난 열 가지 재앙과 출애굽한 직 후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놀라운 일을 직접 목도했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먼저 말씀합니다.
신 29: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29: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광야에서 보고 경험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광야에서 특별히 경험하게 되는 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40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셨지만 너희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신이 해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를 키우다보면 먹는 것 외에 특별히 신경 쓰는 것 중 하나가 옷과 신발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기본적인 필요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는 동안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모두 채워주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광야에서 베푸신 은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광야를 통과해야 할 넓은 땅으로 가정하고 거치게 되는 정거장을 몇 군데 가정해서 생각해 볼까 합니다.
첫 번째 정거장은 ‘마라’라는 정거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온 뒤 3일 길을 걸었지만 물을 얻지 못하다가 마라라는 곳에 도착해서 드디어 고대하던 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물을 마셔보니 맛이 써서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당장 불평이 모세에게 쏟아졌습니다. ‘우리가 이 광야에서 무엇을 마신단 말입니까?’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마자 물맛이 쓴맛에서 단맛으로 변하여 마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간혹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물이 없다고 그렇게 불평할까, 참 믿음이 없고 수준이하의 사람들이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도 다를 바 없는 존재들입니다. 어떤 급한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부르짖다가 해결이 되면 금방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문제를 만나면 또 염려하고 고민하며 불평합니다. 광야 속에서 광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삶의 특징은 불평입니다. 불평을 자꾸 늘어놓는 어떤 부인을 보고 그 남편에게 한 사람이 혹시 당신 부인이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있다고 하자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죠. 남편은 자기 아내가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어떤 제조업에 종사하는지 물으니 불평 제조업이라고 하더랍니다. 매일 매시간 불평만 쏟아놓는다는 말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광야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나쁜 직업은 불평 제조업입니다. 만약 그 불평을 감사로 바꾸지 않는 한 광야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감사는 선택이고 습관입니다. 광야 생활을 성공적으로 거치는 한 가지 비결 중 하나는 감사입니다. 어떤 궁핍에도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며 감사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고백합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어떤 일에도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가 영적으로 배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마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은혜는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는 은혜였습니다. 모세가 나무를 물에 던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을 때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그 나무가 무슨 약효가 있었을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순종을 통해 쓴 환경 속에서도 단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놓습니다.
두 번째 광야 생활을 행하며 거친 정거장은 ‘신 광야’ 정거장입니다.
그들이 출애굽한 후 한 달 보름이 지났을 때 신 광야에 이르게 됩니다. 그 때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또 다시 원망과 불평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에서 싸 왔던 양식이 바닥이 나자 그들은 애굽 시절 고기 가마 곁에 앉아서 먹던 때를 그리워하며 ‘차라리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죽여주셨더라면 이곳 광야까지 나와서 굶어 죽지는 않을 텐데’라고 원망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대한 원망이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원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야기 합니다.
출 16:8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원망하는 소리를....그 방향이 어떤 사람을 향하는 원망이든 하나님은 자신을 향한 원망이심을 아십니다. 우리는 종종 말을 할 때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의식 없이 함부로 말을 뱉기가 쉽습니다. 어떤 경우는 ‘차라리 죽고 싶다’란 극단적인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민수기 14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간 열 두 명의 정탐꾼 중 열 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 땅을 절대 점령할 수 없다. 그곳에는 너무 크고 강한 족속이 있고 성벽도 너무 튼튼해서 우리가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올라가서 취하면 된다.’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온 백성들이 그 부정적인 뉴스에 감염이 되어 함께 통곡을 하면서 아론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애굽에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20세 이상 성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 못한 채 광야가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뱉은 말은 모두 하나님께 대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살 시위를 떠난 화살과 쏟아진 물과 한 번 뱉은 말은 결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무심코 던진 3초의 말이 30년간의 상처를 만드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조심해야 합니다. 말할 때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말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지만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듭된 원망에도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저녁에는 고기거리로 메추라기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에 특징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이슬이 마를 때에 진 주위에 내렸다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면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거둘 양식은 하루 먹을 양식뿐이었습니다. 내일을 위해 남겨둔 사람들은 다음 날 보니 상해서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겨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만나는 사재기를 할 수가 없는 양식이었습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 때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었지만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어떤 지역에서는 사재기 현상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사재기는 불안함의 표현입니다.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만나는 매일의 양식이어야 했습니다. 만나를 매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은 매일 하나님의 공급을 기대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양식 주시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시지 않을까라고 걱정한다면 사재기에 대한 유혹이 생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매일 읽는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의 은혜로 일주일을 산다고 말합니다. 물론 전혀 틀린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지만 냉정하게 보면 부적절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먹은 말씀이 일주일 양식으로, 한 달 전 먹은 말씀을 일 년 양식으로 삼는다면 금방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매일 일정량을 규칙적으로 먹는 사람이 건강한 법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아침에 거두어야 했습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기 시작하면 그것은 녹아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 일찍 조용한 가운데 먹는 말씀과 해가 다 뜨고 주위가 산만한 가운데 먹는 말씀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말씀의 질이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태도와 소화하는 환경에 차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매일의 초자연적인 음식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매일 말씀을 통한 생명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광야생활을 잘 감당해 나가도록 힘과 능력을 줄 것입니다. 이것이 만나의 은혜입니다. 아이러니하게 광야생활 중에 있다 보면 오히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만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만나는 우리의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르비딤의 은혜입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두 가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한 가지는 마실 물이 없어 백성들이 또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하자 물이 반석에서 솟아났지요. 목마름을 채워주신 은혜를 누리는 것도 잠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기치 않은 외부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아말렉 족속들이 쳐 들어온 것이지요. 이 때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나가 싸우도록 하고 자신은 아론과 훌과 같이 전쟁터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지팡이를 높이 들었습니다. 신기한 사실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피곤해서 손을 내리면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론과 훌이 모세를 돌에 앉히고 자신들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이 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 올렸습니다. 결국 해가 지도록 그 손이 내려오지 않았고 결국 여호수아가 칼로 아말렉을 무찔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의 승리라고 믿습니다. 지상에서 싸운 여호수아가 중요할까요, 아니면 산꼭대기에서 손을 든 모세가 중요할까요? 분명한 것은 둘 다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무시하고 기도에만 매달려 살아서는 곤란합니다. 중요한 것은 승패가 산꼭대기에서 결정이 났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승리...이것이 광야에서 누리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어떻게 하면 누릴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란 구절입니다. 승리를 확인할 때까지 손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에서 승리하게 한 기도의 진수입니다. 해가 지도록... 승리가 확인될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것이 우리가 광야에서 위기를 만날 때 드리게 되는 기도입니다. 광야에 있는 것만 해도 힘든데 그 속에서 위기를 만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설상가상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기도의 무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를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하고 난 뒤 기도내용을 다음 기도할 때까지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응답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할 위기에 처할 때 드리는 기도는 다릅니다. 끈질긴 기도, 응답될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않는 기도를 통해 얻게 되는 승리가 바로 광야에서 누리게 되는 은혜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도는 간절하고 집요합니까? 해가 지도록, 응답될 때까지 수시로 기도하시겠습니까?
사실 통과해야 할 광야의 은혜 정거장을 6 곳으로 잡았습니다. 이제까지 3군데를 들렸으니 아직도 3곳이 남았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설교를 위해 남겨두겠습니다. 우리 모두 광야를 거치는 동안 마라의 정거장에서 불평을 감사로 바꾸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신 광야 정거장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만나의 은혜를 날마다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르비딤 정거장에서 해가 지도록 기도한 모세와 아론과 훌의 기도처럼 광야에서 기도의 승리를 경험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각자 잠시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경험했던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은혜, 매일 내려주신 만나의 은혜, 해가 지도록 중단하지 않았던 기도를 통한 승리의 은혜를 들으시면서 떠오르시는 한 분이 계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은 쓴물을 단물이 되게 하셨듯이 손 씻는 용도의 맹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만나가 되십니다. 또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중보자가 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승리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메마른 광야를 걷는다 해도 예수님이 동행하시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능히 광야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 같이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광야 속에서 내려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도록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드리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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