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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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10-25 09:16 조회4,444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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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8:5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18: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18: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18: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18: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먼저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나눕니다. 나누는 자나 듣는 자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에 민감하게 하시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실천하여 모든 행하는 일에 복 받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최근에 어떤 책을 읽다가 아주 재미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토끼와 거북이에 대한 이야기인데 우리는 보통 부지런한 거북이가 게으른 토끼를 이겼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것을 좀 색다른 각도로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의 글입니다.
‘저는 어릴 때 학교에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린 마음에 느린 거북이가 왜 빠른 토끼와 달리기 경주를 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토끼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결국 아무리 빠른 토기라 할지라도 교만하면 거북이에게 진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정작 거북이가 왜 그런 시합에 나섰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거북이는 아예 처음부터 토끼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경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거북이는 토끼를 이기는데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정상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북이에게는 토끼가 잠을 자든 안자든 예초부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가 가진 교훈적 의미는 물론 부지런함, 겸손의 미덕이 중요하다는 사실이겠지만 이 이야기 밑바탕에 경쟁의식이 깔려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와 가정교육에 큰 문제점이 있다는 의견에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절대적 가치나 재능을 존중하기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구도 안에서 싸워 이겨야 성공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내가 얼마나 잘 했는가의 평가는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보다 내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느냐로 평가됩니다. 사실 오리가 강아지만큼 뛸 수 없고 강아지가 오리만큼 헤엄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강아지가 오리만큼 헤엄치기를 요구하고 있고 오리가 강아지처럼 뛸 수 있기를 강요하고 있는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경쟁 구도가 부정적 산물로 만들어내는 감정이 바로 시기와 질투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 사건에서부터 등장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고 동생 아벨의 제물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분노의 배경에는 분명 시기의 감정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시기가 분노로 발전되고 분노는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성경은 시기 때문에 일어난 부끄러운 일들을 가감 없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편 야곱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라헬과 레아가 서로 질투한 것 정도는 애교로 봐 줄 수 있다 하더라도 요셉의 형들이 동생 요셉을 시기해서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결국 종으로 팔아넘긴 일은 끔찍한 범죄행위였습니다. 그럼 잠간 신약으로 넘어가 볼까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총독 빌라도 앞에서 고발을 했습니다. 그 때 총독 빌라도는 대중을 선동하던 유대 지도자들의 동기가 바로 시기와 질투였음을 간파했습니다. 예수님이 대중들의 호응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입지가 위협받는 것을 느끼면서 그들은 불안했던 것이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27: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게 된 계기는 바로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시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던 과정에서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고 많은 무리가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유대지도자들이 보인 반응이 어땠을까요?
행 5: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시기로 예수님을 넘겨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한 그들은 또다시 사도들에 대해 시기가 가득하여 급기야 그들을 잡아 옥에 넣습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제자 사이에도 시기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주의 나라가 임할 때 두 아들중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세워달라고 청탁을 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앞에서도 치맛바람이 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난 남은 열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곁눈질 하면서 어찌 저럴 수가 있냐며 수군거리고 분노하며 일제히 성토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도 누가 크냐에 대해 비교를 하면서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종종 분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내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잘못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분노인지를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분노의 감정 속에는 자기중심적인 동기가 감추어져 있을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막의 성자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기도와 금식으로 단련된 영성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어느 날 마귀가 그를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부터 줄 수 있는 온갖 것으로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 마디를 던졌답니다. ‘당신 알고 있습니까? 당신 동생이 그 도시에서 주교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이야기를 들은 성자가 갑자기 눈꼬리가 올라가면서 얼굴이 험악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우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고 난 후 맡긴 일마다 지혜롭게 처리하자 사울은 다윗을 신임하고 그를 군대의 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게 된 것은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환영하면서 부른 노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을에서 모두 나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적국이었던 블레셋 사람들도 알게 될 정도로 널리 알려졌지요. 하지만 그 노래가사를 들은 사울왕은 불쾌했습니다. ‘나는 천이고 다윗이 만이라고?’ 그는 노래 가사를 생각하면서 비교 의식에 사로잡혔고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다윗을 왕위를 빼앗을 경쟁자로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으며 다윗을 지속적으로 주목하게 됩니다. NIV 성경에는 주목하였다는 말을 ‘Saul kept a jealous eye on David.’ 즉, 질투하는 눈으로 다윗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보았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초기에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용맹했습니다. 그는 분명 좋은 자질을 갖춘 지도자였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기름 부어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교만해졌고 경박해졌으며 질투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심리학 교수인 피터 살로비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20%는 질투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질투의 특성 중 하나가 자기와 같은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있을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예를 든다면 음식 장사를 하는 사람이 꽃 가게가 돈을 많이 번다고 부러워하지 않고 회사원이 고소득을 올리는 농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보통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 사이에 질투가 생깁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땅을 사면 아무렇지 않지만 이웃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런 시기 질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로나 권사는 같은 장로나 권사, 집사는 집사끼리 목사는 다른 교회 목사끼리 은근히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보통 질투의 절반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말을 확대시키면서 의심으로 발전합니다. 일단 의심하게 되면 대화의 벽이 생기고 대화가 단절되면 사실관계를 알아보지도 않고 결국 불신하게 되어 관계가 파괴되고 마는 것이죠. 사울왕은 여인들의 노래를 듣고 다윗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확대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의심하고 사실 관계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다윗을 불신했고 결국 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시기는 시기하는 사람의 마음과 육신을 병들게 합니다. 잠 14장에서 말씀합니다.
잠 14:30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그리고 시기는 분노보다 더 심각하게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잠 27장입니다.
잠 27: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그리고 시기와 다툼은 모든 악한 일의 모판이 됩니다. 즉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서 온갖 종류의 악이 자란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3장입니다.
약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시기와 질투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이며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장점들을 비하시키고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시기는 암 세포와 같습니다. 우리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부정적인 에너지로 바꾸어 소모시키고 고갈시켜버립니다. 시기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이게 되고 정상적인 판단이 흐려집니다. 시기와 질투는 타인의 성공을 슬퍼하고 타인의 불행을 기뻐합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란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시기의 화살은 타인을 향하지반 상처는 결국 자신이 입습니다. 다른 사람을 망가뜨리기 전에 먼저 자기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전성기에 그를 흠모하며 시기했던 궁정 음악가 살리에리의 애증을 다룬 영화입니다. 처음에 살리에리는 자신의 재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원했습니다. 그가 처음 모짜르트를 만났을 때 그의 천재성의 반했고 그를 흠모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한동안 그를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능력이 모차르트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흠모의 마음은 점점 애증으로 변하고 다시 분노로 변했습니다. 결국 살리에리는 모짜르트를 독살하기에 이르고 자신도 정신병에 걸려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물론 사실과 차이가 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현대판 살리에리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육신에 속한 미성숙한 자, 즉 영적 어린이의 특성입니다. 고전 3장입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런 미성숙한 모습은 다름 아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현 주소였습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은 육신을 따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유치하게 보이고 성숙할수록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의 속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시기와 질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아이의 속성인 시기와 질투를 버릴 수 있게 될까요?
먼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특별히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축복하십시오. 시기심을 버리고 축복해 주면 우리 자신의 삶이 자유해지고 풍성해집니다. 막혔던 은혜의 파이프가 뚫립니다. 19세기 말 영국 런던에서 찰스 스펄전과 캠벨 몰간 그리고 마이어 목사가 동시대에 목회를 했습니다. 그 때 마침 몰간 목사가 미국으로 사역을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마이어는 친구 목사의 미국 사역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 후 마치고 몰간 목사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고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쪽으로 몰려갔죠. 그때 마이어 목사님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몰간 목사가 미국에 있을 때는 기도하기 쉬웠는데 서로 같은 도시에서 사역을 하니 친구를 위해 기도하지 않게 되는구나. 나는 스펄전 목사처럼 설교로 인기 얻지 못하고 몰간 목사처럼 권위 있는 목회도 하지 못하는데...’ 마이어 목사는 괴로워하며 속에 일어나는 질투의 감정을 극복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기도를 바꿔라, 질투를 극복하지 하려 하지 말고 그를 축복해라’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후 마이어 목사는 이런 유명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몰간 목사님을 축복해 주셔서 사람들이 그 교회가 메어지게 해 주시고 들어갈 자리가 없거든 우리 교회로 보내주시옵소서’
질투는 무엇보다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질투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경쟁적인 세상 속에서 상대방을 늘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기와 질투를 이기는 길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사랑받는 열한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형들은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는데 요셉이 두 번의 꿈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꿈은 모두 형들이 자기에게 절한다는 내용이었으며 특별히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한 별, 즉 부모와 열한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하더라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 이야기를 아버지와 형들에게 하자 아버지 야곱은 먼저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반응들을 보십시오.
창 37: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형들은 요셉의 말을 듣고 그냥 시기했지만 아버지 야곱은 버릇이 없다고 꾸짖고 나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갈 때 도중에 돌베개를 베고 자던 중 꾸었던 꿈처럼 요셉에게 주신 꿈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두고두고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보통 자식이 아버지보다 낫다고 하면 아버지로서는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생이 형보다 낫다고 하면 형의 마음은 보통 불쾌해집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포용적이지만 형제의 마음은 아버지와 같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신약의 이야기가 바로 돌아온 탕자와 그의 형 이야기입니다.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을 본 아버지는 너무 기뻐했지만 형은 정반대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시기와 질투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대하도록 늘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섬기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내가 온 것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섬기는 사람에게는 질투와 시기가 들어갈 자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한 마을에서 다친 아이들이 상처를 정성으로 치료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인근에 살던 이웃 주민이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대답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은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이를 섬기는 동안에는 시기와 질투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비교의식으로부터 자유함을 줍니다.
성경에 보면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시기하고 질투하기보다 아름다운 동행을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갈렙과 요나단입니다. 갈렙은 가나안 정탐 보고를 마치고 온 뒤 여호수아와 함께 나머지 열 명의 정탐군들의 부정적인 보고에 맞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았지만 결코 1인자가 된 여호수아의 위치를 탐내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왕과 함께 다윗을 자신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여길 수 있었지만 시기와 질투가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 주는 삶을 사십시오. 아버지의 마음을 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섬기는 자로서의 사명으로 삶을 사십시오. 우리 내면을 병들게 하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시기와 질투를 버리십시오. 다른 사람을 축복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고 섬기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풍성해질 뿐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8: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18: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18: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18: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먼저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나눕니다. 나누는 자나 듣는 자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에 민감하게 하시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실천하여 모든 행하는 일에 복 받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최근에 어떤 책을 읽다가 아주 재미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토끼와 거북이에 대한 이야기인데 우리는 보통 부지런한 거북이가 게으른 토끼를 이겼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것을 좀 색다른 각도로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의 글입니다.
‘저는 어릴 때 학교에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린 마음에 느린 거북이가 왜 빠른 토끼와 달리기 경주를 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토끼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결국 아무리 빠른 토기라 할지라도 교만하면 거북이에게 진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정작 거북이가 왜 그런 시합에 나섰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거북이는 아예 처음부터 토끼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경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거북이는 토끼를 이기는데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정상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북이에게는 토끼가 잠을 자든 안자든 예초부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가 가진 교훈적 의미는 물론 부지런함, 겸손의 미덕이 중요하다는 사실이겠지만 이 이야기 밑바탕에 경쟁의식이 깔려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와 가정교육에 큰 문제점이 있다는 의견에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절대적 가치나 재능을 존중하기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구도 안에서 싸워 이겨야 성공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내가 얼마나 잘 했는가의 평가는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보다 내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느냐로 평가됩니다. 사실 오리가 강아지만큼 뛸 수 없고 강아지가 오리만큼 헤엄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강아지가 오리만큼 헤엄치기를 요구하고 있고 오리가 강아지처럼 뛸 수 있기를 강요하고 있는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경쟁 구도가 부정적 산물로 만들어내는 감정이 바로 시기와 질투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 사건에서부터 등장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고 동생 아벨의 제물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분노의 배경에는 분명 시기의 감정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시기가 분노로 발전되고 분노는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성경은 시기 때문에 일어난 부끄러운 일들을 가감 없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편 야곱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라헬과 레아가 서로 질투한 것 정도는 애교로 봐 줄 수 있다 하더라도 요셉의 형들이 동생 요셉을 시기해서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결국 종으로 팔아넘긴 일은 끔찍한 범죄행위였습니다. 그럼 잠간 신약으로 넘어가 볼까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총독 빌라도 앞에서 고발을 했습니다. 그 때 총독 빌라도는 대중을 선동하던 유대 지도자들의 동기가 바로 시기와 질투였음을 간파했습니다. 예수님이 대중들의 호응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입지가 위협받는 것을 느끼면서 그들은 불안했던 것이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27: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게 된 계기는 바로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시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던 과정에서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고 많은 무리가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유대지도자들이 보인 반응이 어땠을까요?
행 5: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시기로 예수님을 넘겨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한 그들은 또다시 사도들에 대해 시기가 가득하여 급기야 그들을 잡아 옥에 넣습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제자 사이에도 시기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주의 나라가 임할 때 두 아들중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세워달라고 청탁을 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앞에서도 치맛바람이 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난 남은 열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곁눈질 하면서 어찌 저럴 수가 있냐며 수군거리고 분노하며 일제히 성토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도 누가 크냐에 대해 비교를 하면서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종종 분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내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잘못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분노인지를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분노의 감정 속에는 자기중심적인 동기가 감추어져 있을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막의 성자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기도와 금식으로 단련된 영성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어느 날 마귀가 그를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부터 줄 수 있는 온갖 것으로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 마디를 던졌답니다. ‘당신 알고 있습니까? 당신 동생이 그 도시에서 주교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이야기를 들은 성자가 갑자기 눈꼬리가 올라가면서 얼굴이 험악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우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고 난 후 맡긴 일마다 지혜롭게 처리하자 사울은 다윗을 신임하고 그를 군대의 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게 된 것은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환영하면서 부른 노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을에서 모두 나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적국이었던 블레셋 사람들도 알게 될 정도로 널리 알려졌지요. 하지만 그 노래가사를 들은 사울왕은 불쾌했습니다. ‘나는 천이고 다윗이 만이라고?’ 그는 노래 가사를 생각하면서 비교 의식에 사로잡혔고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다윗을 왕위를 빼앗을 경쟁자로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으며 다윗을 지속적으로 주목하게 됩니다. NIV 성경에는 주목하였다는 말을 ‘Saul kept a jealous eye on David.’ 즉, 질투하는 눈으로 다윗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보았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초기에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용맹했습니다. 그는 분명 좋은 자질을 갖춘 지도자였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기름 부어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교만해졌고 경박해졌으며 질투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심리학 교수인 피터 살로비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20%는 질투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질투의 특성 중 하나가 자기와 같은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있을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예를 든다면 음식 장사를 하는 사람이 꽃 가게가 돈을 많이 번다고 부러워하지 않고 회사원이 고소득을 올리는 농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보통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 사이에 질투가 생깁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땅을 사면 아무렇지 않지만 이웃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런 시기 질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로나 권사는 같은 장로나 권사, 집사는 집사끼리 목사는 다른 교회 목사끼리 은근히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보통 질투의 절반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말을 확대시키면서 의심으로 발전합니다. 일단 의심하게 되면 대화의 벽이 생기고 대화가 단절되면 사실관계를 알아보지도 않고 결국 불신하게 되어 관계가 파괴되고 마는 것이죠. 사울왕은 여인들의 노래를 듣고 다윗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확대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의심하고 사실 관계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다윗을 불신했고 결국 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시기는 시기하는 사람의 마음과 육신을 병들게 합니다. 잠 14장에서 말씀합니다.
잠 14:30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그리고 시기는 분노보다 더 심각하게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잠 27장입니다.
잠 27: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그리고 시기와 다툼은 모든 악한 일의 모판이 됩니다. 즉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서 온갖 종류의 악이 자란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3장입니다.
약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시기와 질투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이며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장점들을 비하시키고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시기는 암 세포와 같습니다. 우리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부정적인 에너지로 바꾸어 소모시키고 고갈시켜버립니다. 시기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이게 되고 정상적인 판단이 흐려집니다. 시기와 질투는 타인의 성공을 슬퍼하고 타인의 불행을 기뻐합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란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시기의 화살은 타인을 향하지반 상처는 결국 자신이 입습니다. 다른 사람을 망가뜨리기 전에 먼저 자기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전성기에 그를 흠모하며 시기했던 궁정 음악가 살리에리의 애증을 다룬 영화입니다. 처음에 살리에리는 자신의 재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원했습니다. 그가 처음 모짜르트를 만났을 때 그의 천재성의 반했고 그를 흠모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한동안 그를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능력이 모차르트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흠모의 마음은 점점 애증으로 변하고 다시 분노로 변했습니다. 결국 살리에리는 모짜르트를 독살하기에 이르고 자신도 정신병에 걸려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물론 사실과 차이가 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현대판 살리에리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육신에 속한 미성숙한 자, 즉 영적 어린이의 특성입니다. 고전 3장입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런 미성숙한 모습은 다름 아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현 주소였습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은 육신을 따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유치하게 보이고 성숙할수록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의 속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시기와 질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아이의 속성인 시기와 질투를 버릴 수 있게 될까요?
먼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특별히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축복하십시오. 시기심을 버리고 축복해 주면 우리 자신의 삶이 자유해지고 풍성해집니다. 막혔던 은혜의 파이프가 뚫립니다. 19세기 말 영국 런던에서 찰스 스펄전과 캠벨 몰간 그리고 마이어 목사가 동시대에 목회를 했습니다. 그 때 마침 몰간 목사가 미국으로 사역을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마이어는 친구 목사의 미국 사역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 후 마치고 몰간 목사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고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쪽으로 몰려갔죠. 그때 마이어 목사님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몰간 목사가 미국에 있을 때는 기도하기 쉬웠는데 서로 같은 도시에서 사역을 하니 친구를 위해 기도하지 않게 되는구나. 나는 스펄전 목사처럼 설교로 인기 얻지 못하고 몰간 목사처럼 권위 있는 목회도 하지 못하는데...’ 마이어 목사는 괴로워하며 속에 일어나는 질투의 감정을 극복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기도를 바꿔라, 질투를 극복하지 하려 하지 말고 그를 축복해라’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후 마이어 목사는 이런 유명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몰간 목사님을 축복해 주셔서 사람들이 그 교회가 메어지게 해 주시고 들어갈 자리가 없거든 우리 교회로 보내주시옵소서’
질투는 무엇보다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질투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경쟁적인 세상 속에서 상대방을 늘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기와 질투를 이기는 길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사랑받는 열한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형들은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는데 요셉이 두 번의 꿈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꿈은 모두 형들이 자기에게 절한다는 내용이었으며 특별히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한 별, 즉 부모와 열한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하더라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 이야기를 아버지와 형들에게 하자 아버지 야곱은 먼저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반응들을 보십시오.
창 37: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형들은 요셉의 말을 듣고 그냥 시기했지만 아버지 야곱은 버릇이 없다고 꾸짖고 나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갈 때 도중에 돌베개를 베고 자던 중 꾸었던 꿈처럼 요셉에게 주신 꿈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두고두고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보통 자식이 아버지보다 낫다고 하면 아버지로서는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생이 형보다 낫다고 하면 형의 마음은 보통 불쾌해집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포용적이지만 형제의 마음은 아버지와 같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신약의 이야기가 바로 돌아온 탕자와 그의 형 이야기입니다.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을 본 아버지는 너무 기뻐했지만 형은 정반대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시기와 질투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대하도록 늘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섬기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내가 온 것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섬기는 사람에게는 질투와 시기가 들어갈 자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한 마을에서 다친 아이들이 상처를 정성으로 치료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인근에 살던 이웃 주민이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대답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은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이를 섬기는 동안에는 시기와 질투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비교의식으로부터 자유함을 줍니다.
성경에 보면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시기하고 질투하기보다 아름다운 동행을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갈렙과 요나단입니다. 갈렙은 가나안 정탐 보고를 마치고 온 뒤 여호수아와 함께 나머지 열 명의 정탐군들의 부정적인 보고에 맞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았지만 결코 1인자가 된 여호수아의 위치를 탐내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왕과 함께 다윗을 자신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여길 수 있었지만 시기와 질투가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 주는 삶을 사십시오. 아버지의 마음을 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섬기는 자로서의 사명으로 삶을 사십시오. 우리 내면을 병들게 하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시기와 질투를 버리십시오. 다른 사람을 축복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고 섬기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풍성해질 뿐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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