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서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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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1-03-09 09:45 조회4,559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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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3: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차츰차츰 많은 궁금증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중 하나는 분명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문명한데 왜 내 삶속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까? 물론 예수님 당시처럼 죽은 자가 살아나고 맹인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는 것처럼 드라마틱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하나님이 내 삶속에서 일하시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경험은 없을까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이 성장할수록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은 갈망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을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은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볼까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게 되셨나요? 이성적, 논리적으로 믿게 된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한다면 불가능합니다. 요 15:16 말씀입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때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 같지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주님이 불러 주지 않으면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된 것은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 섭리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유튜브를 통해 예배에 참여하고 계시는 것 자체가 물론 또 하나의 은혜의 증거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다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먼저 모세 이야기로부터 출발하겠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후 궁에서 자라면서 애굽의 학문을 배워 어떻게 보면 모든 면에서 탁월하고 유능한 지도자의 면모를 갖추어 갔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애굽에서 압제 당하던 동족들을 구원할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순간 그가 원하던 꿈과 계획에서 멀어지고 말았지요.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행 7장입니다.
행 7: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7: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7: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7: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한 가지를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 자신을 사용하셔서 동족을 구원하실 것이란 사실을 형제들이 당연히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죠. 하지만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네가 뭔데?’라고 대들었지요. 모세는 그 일이 탄로 나면서 목숨이 위태로워져서 도주할 수밖에 없었고 이 후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꿈은 크고 원대한 꿈이었습니다. 꿈 자체가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이루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과를 본다면 모세는 ‘지금이다’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모세는 ‘이 방법으로’라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은 모세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창 15장 13절입니다.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5: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오랜 전 아브라함에게 향후 그의 자손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먼저 애굽에서 객으로 살면서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이고 400년이 지나면 그곳에서 다시 나오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셉도 죽기 직전에 남은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당신들을 인도하사 반드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그 때 자신의 해골도 가지고 나갈 것을 당부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동족들을 규합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믿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지요. 행 7장 이하에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봅니다.
행 7: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7: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7: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7: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7: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모세는 나이 40이 되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첫 단계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처절한 실패였습니다. 모세는 꿈을 완전히 접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으로 40년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인간적인 의미에서 더 이상 뭔가를 시작하기가 어려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미 80세 노인이 되어버린 모세로서는 과거의 철철 넘치던 자신감과 용기는 다 사라졌습니다. 최고로 앞서 가던 지성도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꿈꾸던 이스라엘 동족 구원에 대한 비전도 내려놓은 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점점 노쇠해 가는 몸과 손에 들려진 지팡이만 남았습니다. 화려한 궁이 아닌 적막한 들판에서의 마치 허송세월 같은 40년이 차자 바로 이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그 시작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출 3장입니다.
출 3: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40세 때는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이스라엘 동족들이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동족을 괴롭히던 애굽인을 쳐 죽였지만 완전 오판이었습니다. 동족인 형제가 돕던 자신에게 동조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꿈을 실현하고자 준비하던 모세는 도망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럴 수가, 나의 꿈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다니, 나는 어떻게 재기할 수 있을까? 당신들을 향한 나의 꿈을 몰라주다니,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교차하지 않았을까요? 모세의 치명적인 실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기 전에 먼저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똑같이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선하고 좋은 목적을 품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지 않은 채 먼저 나서다보면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달리기 시합에서 보면 총소리가 울리기 전에 뛰어 나가면 실격처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먼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이 일하시겠다는 신호입니다. 이제 출발선에 모세가 제대로 서게 된 것입니다. 40년 후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만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그는 순순히 벗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종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훌륭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내가 내 인생의 주도권을 쥐고 내가 이루려고 한다면 내 일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한다면 내 인생의 선한 뜻이라 해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력자가 아니라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모시기까지는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자, 다시 한 번 다른 측면에서 보십시다. 모세의 삶에서 일어난 일을....그는 하나님을 자기 계획 속에 끌어 들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계획 속에 들어오실 만한 작은 분이 아니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은 언뜻 사소한 차이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큰 갭이 존재합니다. 전혀 다른 삶이지요.
하나님을 내 계획 속으로 당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가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계시나요?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나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나요? 이 첫 번째 패턴에서 두 번째 패턴으로 변화되는데 까지 모세는 40년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입니다.
요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해 달라고 하시지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곳, 바로 그곳에 예수님은 늘 계셨습니다. 언제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구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어디서 일하시고 계시는가를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신호를 보내시기 전에 출발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내 뜻이 아버지의 뜻보다 앞서고 내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과 무관한 곳에서 시작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과 무관한 시간에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니까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아무리 공손하게 보여도 하나님을 심부름꾼처럼 여기는 기도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먼저 나서지 않는 삶을 배우십시오. 사무엘은 어린 시절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져 제사장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것은 성막에서 하나님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실 때 ‘말씀하옵소서.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배우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정탐꾼들이 가나안 정탐을 하고 돌아온 뒤 보고한 내용은 백성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것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강할 뿐 아니라 방비가 튼튼하여 우리가 쳐들어가다가는 도리어 다 죽겠다, 이것은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고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백성들 가운데서 다시 이집트로 되돌아가자는 말이 나왔고 반대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결국 부정적인 보고로 악평을 한 사람들은 재앙으로 다 죽었고 20세 이상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소멸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백성들은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던 자기들의 힘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가나안으로 올라가겠다고 하며 산꼭대기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그들을 말리면서 이렇게 경고했지요.
민 14:42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14:43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14:44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모세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으니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도 진영 가운데 머물게 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모세의 권면을 무시하고 당돌하게 올라갔다가 참패를 당하고 밀려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지 선하고 굉장한 계획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실패로 종결되고 맙니다.
많은 희생자를 낸 1861년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과 북군의 지휘관들은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으며 똑같이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고통과 죽음이 온 땅을 휩쓸 때 남북 양 진영이 같은 하나님께 서로 승리를 간구하는 모순 속에서 링컨은 전쟁 도중에 ‘노예해방’을 선포하였습니다. 노예제도는 분명 잘못된 제도였습니다. 그는 전방 지휘관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을 도와주시도록 기도해 달라는 부탁에 하나님이 우리 편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나님 편에 서 있기를 기도하겠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말과 우리가 하나님 편이란 말은 언뜻 비슷하게 들리지만 사실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 삶 속에, 혹은 나의 계획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는 시도이지요.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면 나의 계획, 나의 장래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계획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기는 하나님이 너무 크신 분이십니다. 마치 조그만 컵에 바닷물을 모두 담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과는 맞지 않는 방향에서 일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주파수와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다이얼을 돌리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 주위에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어디서 일하시는지, 하나님이 현재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 곳에 자신을 두십시오.
며칠 전 이번 주 말씀을 준비하다가 마치고 학교에서 내려가면서 이런 기도를 했지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에 제가 있길 원합니다.’ 그런데 멀찍이 한 나이 많으신 어르신이 전동 휠체어를 타시고 밖으로 나와 계속 두리번거리고 계시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뭔가 찾고 있으신 것 같았지요. 아무래도 제가 도와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서 어디를 찾으시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경성대학교 신학교를 찾는다고 하시더군요. 처음에는 좀 의아했습니다. 신학과가 나닌 신학교를 두 다리를 못 쓰시는 95세 어르신이 찾으실 이유가 있을까요? 그래서 물어보니 자기는 경성대학교 신학과 전신인 부산 신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인데 졸업장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신학교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하시더군요. 은퇴하신 목사님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과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잘 설명해 드릴 수가 있었지요. 그리고 지금은 이미 학교 근무 시간이 끝난 상황이라 내일 제가 학교 가면 알아보고 연락드리겠다고 하면서 연락처를 받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를 만나지 않으셨다면 이 추운 날씨에 95세의 연세로 불편한 몸으로 전동 휠체어를 타시고 그 가파른 정문으로 올라가 지금은 완전히 바뀐 건물 사이를 헤매시면서 직원들이 퇴근한 기간에 어디서 도움을 받으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다소 끔직한 일이었습니다. 그 분이 제게 교직원인가 물으시기에 제가 교목이라는 것을 아시고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해 하시는지.... 다음날 학교에 알아보고 주민 센터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전해드렸지요. 물론 너무 고마워하셨지요.
제가 생각해 보니 기도가 응답된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돕기 원하시는 한 분의 필요 때문에 저를 그 자리에 두셨다고 믿습니다. 즉, 그곳이 하나님께서 일하신 곳이었던 셈입니다. 비록 작은 일긴 했지만 메시지를 준비하던 중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한 일이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기 위해 두 가지를 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않고 시작하다가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지요. 하지만 40년 후 하나님이 떨기나무에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나서 그의 인생은 제대로 리셋이 된 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늘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은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한 우리는 주님이 일하시는 곳과 다른 엉뚱한 곳에서 방황하며 고생하게 될 것입니다.
올 해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앞에서 종의 자세로 살면서 ‘주님, 주님이 일하시는 곳에 있기 하소서.’늘 기도하며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경성대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차츰차츰 많은 궁금증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중 하나는 분명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문명한데 왜 내 삶속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까? 물론 예수님 당시처럼 죽은 자가 살아나고 맹인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는 것처럼 드라마틱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하나님이 내 삶속에서 일하시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경험은 없을까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이 성장할수록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은 갈망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을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은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볼까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어떻게 믿게 되셨나요? 이성적, 논리적으로 믿게 된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한다면 불가능합니다. 요 15:16 말씀입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때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 같지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주님이 불러 주지 않으면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된 것은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 섭리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유튜브를 통해 예배에 참여하고 계시는 것 자체가 물론 또 하나의 은혜의 증거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다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먼저 모세 이야기로부터 출발하겠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후 궁에서 자라면서 애굽의 학문을 배워 어떻게 보면 모든 면에서 탁월하고 유능한 지도자의 면모를 갖추어 갔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애굽에서 압제 당하던 동족들을 구원할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순간 그가 원하던 꿈과 계획에서 멀어지고 말았지요.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행 7장입니다.
행 7: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7: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7: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7: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한 가지를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 자신을 사용하셔서 동족을 구원하실 것이란 사실을 형제들이 당연히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죠. 하지만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네가 뭔데?’라고 대들었지요. 모세는 그 일이 탄로 나면서 목숨이 위태로워져서 도주할 수밖에 없었고 이 후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꿈은 크고 원대한 꿈이었습니다. 꿈 자체가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이루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과를 본다면 모세는 ‘지금이다’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모세는 ‘이 방법으로’라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은 모세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창 15장 13절입니다.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5: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오랜 전 아브라함에게 향후 그의 자손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먼저 애굽에서 객으로 살면서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이고 400년이 지나면 그곳에서 다시 나오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셉도 죽기 직전에 남은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당신들을 인도하사 반드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그 때 자신의 해골도 가지고 나갈 것을 당부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동족들을 규합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믿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지요. 행 7장 이하에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봅니다.
행 7: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7: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7: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7: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7: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모세는 나이 40이 되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첫 단계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처절한 실패였습니다. 모세는 꿈을 완전히 접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으로 40년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인간적인 의미에서 더 이상 뭔가를 시작하기가 어려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미 80세 노인이 되어버린 모세로서는 과거의 철철 넘치던 자신감과 용기는 다 사라졌습니다. 최고로 앞서 가던 지성도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꿈꾸던 이스라엘 동족 구원에 대한 비전도 내려놓은 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점점 노쇠해 가는 몸과 손에 들려진 지팡이만 남았습니다. 화려한 궁이 아닌 적막한 들판에서의 마치 허송세월 같은 40년이 차자 바로 이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그 시작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출 3장입니다.
출 3: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40세 때는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이스라엘 동족들이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동족을 괴롭히던 애굽인을 쳐 죽였지만 완전 오판이었습니다. 동족인 형제가 돕던 자신에게 동조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꿈을 실현하고자 준비하던 모세는 도망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럴 수가, 나의 꿈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다니, 나는 어떻게 재기할 수 있을까? 당신들을 향한 나의 꿈을 몰라주다니,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교차하지 않았을까요? 모세의 치명적인 실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기 전에 먼저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똑같이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선하고 좋은 목적을 품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지 않은 채 먼저 나서다보면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달리기 시합에서 보면 총소리가 울리기 전에 뛰어 나가면 실격처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먼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이 일하시겠다는 신호입니다. 이제 출발선에 모세가 제대로 서게 된 것입니다. 40년 후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만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그는 순순히 벗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종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훌륭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내가 내 인생의 주도권을 쥐고 내가 이루려고 한다면 내 일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한다면 내 인생의 선한 뜻이라 해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력자가 아니라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모시기까지는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자, 다시 한 번 다른 측면에서 보십시다. 모세의 삶에서 일어난 일을....그는 하나님을 자기 계획 속에 끌어 들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계획 속에 들어오실 만한 작은 분이 아니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은 언뜻 사소한 차이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큰 갭이 존재합니다. 전혀 다른 삶이지요.
하나님을 내 계획 속으로 당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가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계시나요?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나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나요? 이 첫 번째 패턴에서 두 번째 패턴으로 변화되는데 까지 모세는 40년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입니다.
요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해 달라고 하시지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곳, 바로 그곳에 예수님은 늘 계셨습니다. 언제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구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어디서 일하시고 계시는가를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신호를 보내시기 전에 출발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내 뜻이 아버지의 뜻보다 앞서고 내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과 무관한 곳에서 시작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과 무관한 시간에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니까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아무리 공손하게 보여도 하나님을 심부름꾼처럼 여기는 기도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먼저 나서지 않는 삶을 배우십시오. 사무엘은 어린 시절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져 제사장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것은 성막에서 하나님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실 때 ‘말씀하옵소서.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배우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정탐꾼들이 가나안 정탐을 하고 돌아온 뒤 보고한 내용은 백성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것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강할 뿐 아니라 방비가 튼튼하여 우리가 쳐들어가다가는 도리어 다 죽겠다, 이것은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고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백성들 가운데서 다시 이집트로 되돌아가자는 말이 나왔고 반대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결국 부정적인 보고로 악평을 한 사람들은 재앙으로 다 죽었고 20세 이상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소멸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백성들은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던 자기들의 힘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가나안으로 올라가겠다고 하며 산꼭대기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그들을 말리면서 이렇게 경고했지요.
민 14:42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14:43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14:44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모세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으니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도 진영 가운데 머물게 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모세의 권면을 무시하고 당돌하게 올라갔다가 참패를 당하고 밀려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지 선하고 굉장한 계획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실패로 종결되고 맙니다.
많은 희생자를 낸 1861년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과 북군의 지휘관들은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으며 똑같이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고통과 죽음이 온 땅을 휩쓸 때 남북 양 진영이 같은 하나님께 서로 승리를 간구하는 모순 속에서 링컨은 전쟁 도중에 ‘노예해방’을 선포하였습니다. 노예제도는 분명 잘못된 제도였습니다. 그는 전방 지휘관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을 도와주시도록 기도해 달라는 부탁에 하나님이 우리 편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나님 편에 서 있기를 기도하겠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말과 우리가 하나님 편이란 말은 언뜻 비슷하게 들리지만 사실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 삶 속에, 혹은 나의 계획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는 시도이지요.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면 나의 계획, 나의 장래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계획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기는 하나님이 너무 크신 분이십니다. 마치 조그만 컵에 바닷물을 모두 담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과는 맞지 않는 방향에서 일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주파수와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다이얼을 돌리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 주위에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어디서 일하시는지, 하나님이 현재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 곳에 자신을 두십시오.
며칠 전 이번 주 말씀을 준비하다가 마치고 학교에서 내려가면서 이런 기도를 했지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에 제가 있길 원합니다.’ 그런데 멀찍이 한 나이 많으신 어르신이 전동 휠체어를 타시고 밖으로 나와 계속 두리번거리고 계시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뭔가 찾고 있으신 것 같았지요. 아무래도 제가 도와드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서 어디를 찾으시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경성대학교 신학교를 찾는다고 하시더군요. 처음에는 좀 의아했습니다. 신학과가 나닌 신학교를 두 다리를 못 쓰시는 95세 어르신이 찾으실 이유가 있을까요? 그래서 물어보니 자기는 경성대학교 신학과 전신인 부산 신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인데 졸업장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신학교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하시더군요. 은퇴하신 목사님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과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잘 설명해 드릴 수가 있었지요. 그리고 지금은 이미 학교 근무 시간이 끝난 상황이라 내일 제가 학교 가면 알아보고 연락드리겠다고 하면서 연락처를 받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를 만나지 않으셨다면 이 추운 날씨에 95세의 연세로 불편한 몸으로 전동 휠체어를 타시고 그 가파른 정문으로 올라가 지금은 완전히 바뀐 건물 사이를 헤매시면서 직원들이 퇴근한 기간에 어디서 도움을 받으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다소 끔직한 일이었습니다. 그 분이 제게 교직원인가 물으시기에 제가 교목이라는 것을 아시고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해 하시는지.... 다음날 학교에 알아보고 주민 센터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전해드렸지요. 물론 너무 고마워하셨지요.
제가 생각해 보니 기도가 응답된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돕기 원하시는 한 분의 필요 때문에 저를 그 자리에 두셨다고 믿습니다. 즉, 그곳이 하나님께서 일하신 곳이었던 셈입니다. 비록 작은 일긴 했지만 메시지를 준비하던 중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한 일이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기 위해 두 가지를 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않고 시작하다가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지요. 하지만 40년 후 하나님이 떨기나무에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나서 그의 인생은 제대로 리셋이 된 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늘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은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한 우리는 주님이 일하시는 곳과 다른 엉뚱한 곳에서 방황하며 고생하게 될 것입니다.
올 해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앞에서 종의 자세로 살면서 ‘주님, 주님이 일하시는 곳에 있기 하소서.’늘 기도하며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경성대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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