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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서 찾으라' (마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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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 아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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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1-28 16:33 조회6,9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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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9:9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 나라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소문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9:10 또 그가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들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9:11 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주민이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들이니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라 하였나이다
9:12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아직도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가지고 왔으나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가 났으며
9:13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 것이었으나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매우 길었으므로 낡아졌나이다 한지라
9: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9: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도로시아 딕스라는 아주 병약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29살이 되었을 때 의사가 당신은 폐병 때문에 앞으로 몇 년 못 살게 될 것이며 혹시 산다 해도 어렵게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의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이 연약한 여성은 후일에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사회 개혁가가 되었던 것이지요. 어떤 계기가 한 연약한 여성의 인생을 이렇게 뒤바꾸어놓게 되었을까요? 건강 회복을 위해 도로시아는 영국으로 요양을 갔는데 그곳에 머물며 성경을 여러 번 읽는 중에 “주님은 제가 제 인생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계속 하나님께 던졌습니다. 1841년 고향 메사추세츠 주로 돌아오자 그녀는 어떤 분으로부터 교도소에서 죄수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그녀가 하나님께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그녀가 성경공부 반을 인도할 때 공부 도중 교도소 뒤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 때문에 공부가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녀가 놀라 무슨 소리냐고 묻자 한 죄수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저들은 정신병자들입니다. 저들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더 놀란 그녀는 간수에게 그 정신병자들을 한 번 만나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간수는 그들을 차마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렸지만 그녀의 끈질긴 요청 때문에 할 수 없이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처음 본 도로시아는 너무 두렵고 놀랐습니다. 차가운 돌감방안에는 두 여인이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사슬에 묶여 있었는데 한 명은 75세가 넘은 노인으로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상태였고 다른 한 명은 18세 정도 되는 젊은 여자였는데 추위 때문에 파랗게 떨면서 ‘선생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하면서 계속 사정했습니다. 간수에게 왜 저들이 저런 대우를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단지 정신병자일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바로 집으로 가서 옷과 담요를 가지고 왔고 관리들에게는 따뜻하게 할 난로를 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저들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쓰레기일 뿐입니다.’란 말뿐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다른 도시에 가서 정신병자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조사해 보았는데 상황은 모두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안 그녀는 결국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일에 뛰어들기로 결심합니다. 관계 자료들을 세심하게 수집하고 의회에 가서 그들의 실상에 대해 계속 알렸습니다. 결국 그녀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사회가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그 영향력이 다른 국가, 즉 캐나다, 영국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그녀는 로마 교횡청 바로 옆에 정신병자들이 수용된 지하 감옥이 있는 것을 보고 교황을 만나 개선을 요구했으며 결국 그들을 위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전 세계 곳곳에 정신병자들을 위한 병원이 세워졌고 인간적인 치료와 대우가 보장되는 변화가 속속 일어났습니다. 29세 때 앞으로 몇 년 못 살 것이라는 말을 들은 한 여인이 80세가 넘게 살면서 용감하게 정신병자를 위한 사회변혁의 선봉에 서서 세상을 바꾸어 놓았던 것은 그녀가 ‘주님, 제 인생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은 데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주님께 묻느냐, 묻지 않느냐’ 단순하게 보이는 이 선택은 우리 인생에 지대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종지부 찍은 후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던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가장 강력한 요새 중 하나였던 여리고 성은 세계 전쟁사의 유래가 없는 기이한 방법으로 함락되었습니다. 매일 군사들이 성을 한 바퀴 돌고 마지막 날 일곱 번 돌고 난 뒤 힘을 다해 함성을 지르니 순식간에 그 견고한 성벽이 허물어져 버린 것이지요. 여리고 성을 함락한 뒤 아이 성도 유인 작전을 사용하여 함락했습니다. 이 소문이 알려지자 주변에 있던 가나안 족속들이 위기 위식을 느끼고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연합 전선을 펼치고 있던 중 이스라엘 진영으로 어떤 사람들이 방문하게 됩니다. 그들의 몰골은 마치 멀리서 온 여행자처럼 초췌했는데 온 목적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근처에 사는 가나안 족속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들이 멀리서 왔다는 증거로 제시한 곰팡이가 핀 떡, 낡아서 터지게 된 포도주 가죽부대, 헤어진 옷과 신발을 보고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은 채 여호수아는 화친을 받아들여 그들을 살려주겠다고 조약을 맺고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난 후 그들이 먼 나라에서 온 것이 아니라 바로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타락으로 멸절시키라고 하신 가나안 일곱 족속 중 하나인 히위족속 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진영이었던 길갈에서 불과 40Km도 안 떨어진 곳에 살던 기브온 주민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멸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치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을 한 바람에 감쪽같이 속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쏟은 물, 하나님 앞에서 맹세까지 한 터라 번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맹세로 인한 문제의 불씨가 약 40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사울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 살아나게 됩니다. 사울 왕은 선조들이 맺은 맹세를 무시한 채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영토 안에 살지 못하도록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죽고 난 뒤 다윗 시대에 3년 동안 거듭하여 기근이 찾아왔으므로 다윗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그 집안이 기브온 사람들의 피를 흘린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다윗은 피해자였던 기브온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사울의 아들 일곱 명을 처형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왜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까요? 아마 승리의 성취감과 안도감에 방심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쫒아내야 할 가나안 일곱 족속 외에 멀리 떨어진 나라와는 먼저 화친을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먼 나라에서 왔다고 하면서 증거까지 제시하니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덜렁 화친했을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께 묻는 습관과 묻지 않는 습관은 사소한 것처럼 보여도 삶의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묻지 아니하고’입니다. 저는 길을 잘 모를 때 사람들에게 묻는 것을 싫어하는 편입니다. 요사이는 휴대폰에 깔린 앱을 보면서 길을 쉽게 찾아 갈 수 있지만 이전에는 길을 찾기가 곤란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 때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긴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묻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물어보면 금방 해결할 것을 스스로 지도보고 찾아서 가자니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되는 일이지만 지금도 쉽게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길을 가는데도 사람들에게 물어서 가는 것이 중요한 데 하물며 보이지 않는 길을 갈 때 하나님께 물어보는 습관이 얼마나 중요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잘 물어보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보통 내가 여쭈어 봐도 답을 들을 수 없더라는 이유를 대지요. 만일 이 길을 갈까요, 아니면 저 길을 갈까요? 물었을 때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저 길로 가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런 경험은 흔치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끈질기게 묻다보면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가 묻지 않았는데도 먼저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래전에 한 번은 제가 진주에 가서 어떤 분을 만나봐야 일이 생겼습니다. 그 분을 한 번도 만나본적도 얼굴도 모른 채 이름만 알고 찾아 갔는데 그 분이 근무하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그 분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겁니다. 보통은 한참동안 이리저리 생각하다보면 떠오르기 마련인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기억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부득이 경비실로 찾아가서 부서에 계신 분 명단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때서야 이름이 떠올랐는데 문제는 그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이미 그 분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바로 부서로 찾아갔더라면 좀 난감한 상황을 겪을 뻔 했는데 그런 일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이었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라도 제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어떤 장애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길을 다른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도중에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아시아 선교의 길을 막으시고 마침내 환상을 통해 유럽 쪽으로 선교의 발길을 돌리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일을 시도하려고 할 때 막다른 골목처럼 길이 막히는 경험을 할 때는 혹시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하나님께 여쭈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지금부터는 이 주제에 관해서 서로 대조되는 두 그룹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그룹은 사울왕과 다윗왕이고 또 다른 그룹은 아합왕과 여호사밧 왕입니다. 먼저 사울과 다윗입니다. 사울이 처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누가 봐도 준수하고 준비된 지도자였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이 있었고 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무시하는 자들에게 분노하거나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위기 상황에서도 아주 용감하고 확실하게 대처했습니다. 하지만 왕이 된 이후에 그는 하나님께 잘 묻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을 때 요나단 왕자와 그의 무기를 든 경호원 단 둘이 적진으로 들어가 전열을 마구 휘저어놓았습니다. 적진에 뭔가 큰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울은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라고 제사장에게 명했습니다. 그 당시는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하나님의 궤나 제사장이 입던 에봇을 두고 묻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십계명의 돌 판이 들어 있던 궤짝이고 에봇이란 제사장이 위에 걸치는 소매 없는 조끼 모양의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하던 순간 블레셋 진영에서는 더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제사장에게 하나님께 묻는 것을 중단시키고는 직접 백성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하나님의 궤를 가져 오라고 해놓고는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되자 더 이상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이유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뜻을 정당화하기 위한 요식행위로 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던 사울은 영영 하나님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블레셋과의 전투가 시작되기 전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사울은 회개하기보다 신접한 여인을 찾아서 묻는 치명적인 죄를 범하게 됩니다. 역대상에서는 그의 비극적인 결말을 이렇게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대상 10: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

그 반면에 다윗은 어땠을까요? 다윗의 삶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 하나가 하나님께 묻는 삶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여러 군데 등장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잘 묻지 않았던 사울왕의 실패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럇여아림이란 곳에 보관되어 있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올 계획을 백성들 앞에서 공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역상 13: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3일 동안 자리를 비웠던 거처 시글락으로 돌아왔더니 모든 집이 불타 있었고 모든 가족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가축과 모든 재산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잿더미만 남은 마을에 슬픔에 압도된 채 주저앉아 목 놓아 울던 부하들은 급기야 다윗에게 책임을 돌리고 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실종된 가족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전혀 알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서 어떤 부하들마저 반기를 들자 궁지에 몰려 엄청난 위기에 빠진 지도자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부하들을 위로하고 설득했을까요? 아니면 신경쇠약에 걸려 주저앉았을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삼상 30: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30:7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30: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은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의견에 먼저 귀를 기울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제가 추격하면 잡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말씀대로 뒤를 추격한 결과 모든 가족과 소유를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 되찾게 됩니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침공해 왔을 때 다윗은 또 하나님께 묻습니다.
삼하 5:19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은 말씀을 듣고 먼저 선제공격을 하여 블레셋을 뿔뿔이 흩어버렸습니다. 또 다시 블레셋이 전열을 가다듬고 올라왔을 때도 다윗은 하나님께 또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후방 기습을 통해서 승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는 삶을 살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치명적인 죄를 범한 적도 있습니다. 부하들이 전쟁터에 나간 중에 혼자 잠을 자고 일어나 저녁 무렵에 왕궁 위를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한 그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그의 죄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그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만일 처음부터 진지하게 하나님께 물었다면 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증상 중 하나가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을 때 우리는 실패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때로는 죄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묻는 삶을 계속 살아간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피할 수 있게 될지 모릅니다.

이제 두 번째 그룹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아합왕과 여호사밧 왕입니다.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되는 아합왕과 그 반대로 남유다의 경건한 왕이었던 여호사밧왕은 서로 딸과 아들을 결혼시키고 사돈관계를 맺음으로 자연스럽게 서로 어울려 지냈습니다. 한 번은 아합왕이 여호사밧왕에게 아람 왕국에 빼앗긴 땅을 찾고 싶으니 자신의 전쟁에 동참하도록 권유했습니다. 여호사밧은 함께 하기로 약속하지만 전쟁을 시작하기 전 아합에게 한 가지 요청을 합니다.
왕상 22:5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아합왕은 선지자 400명을 모았는데 모두 이구동성으로 올라가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거짓말하는 영을 받아 거짓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빗은 다시 요청합니다.
왕상 22:7 여호사밧이 이르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아합왕은 마지못해 늘 불길한 예언만 해서 평소에 미워하던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다고 말하자 여호사밧은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라고 하면서 그를 오게 합니다. 명을 받고 온 미가야는 그 전쟁에서 패하고 아합이 전사할 것을 예언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합은 화가 나서 미가야를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옥에 가두고 명령했습니다. 드디어 벌어진 전쟁에서 미가야의 예언대로 아합은 죽게 되었고 여호사밧은 살아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께 물을 때 자기가 원하는 말씀만 들으려는 태도는 자신의 뜻을 마치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도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선택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설교 말씀을 들을 때도 내게 편한 말씀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이 생기는 말씀에 대해 더 주의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진짜 음성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미리 결정해 놓고 하나님께 묻는다면 이 역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큰 장애물이 됩니다. 

사울왕과 다윗 왕, 아합왕과 여호사밧 왕...이들의 삶의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든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께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 때 중요한 승리를 눈앞에서 놓쳤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께 묻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묻더라도 순종과 관계없는 요식행위였습니다. 아합왕은 자기가 원하는 답을 원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묻는 것이 그저 요식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진심으로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원하는 답을 기대하고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내 생각과 다르다 할지라도 주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기 위해 묻는다면 우리 삶 가운데 다양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올 한 해 동안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매일 매일 하나님께 묻는 삶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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