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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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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5-25 05:15 조회5,76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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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1: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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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는 출애굽한지 3개월째에 시내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착하고 그곳에서 모세가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피의 언약을 맺게 된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어떤 언약이었지요? 출 19장 5-6절을 다시 봅니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될 것이며 하나님을 증거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한 입으로 “예‘라고 응답함으로 언약이 체결되었고 소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 제사를 드린 후에 그 피를 제단과 백성들에게 뿌림으로 피로 맺어진 언약이 공식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소위 계약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엄청난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돌판을 받으러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 머무는 사이 백성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대형 사고를 낸 것이었죠. 출 32장 1절 말씀입니다.
출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모세가 산에 올라가더니 아무 소식이 없자 그들은 모세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이 광야에서 어떻게 해야 될 지 어디로 가야할지 갑자기 막막한 생각이 들자 어처구니없이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론은 백성들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리석고 타협적인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각자 가족들이 가지고 있던 귀 금 고리를 빼어서 가져오라고 한 뒤 그것을 한데 모아 녹여 붓고는 조각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세우고 이것이 바로 너희 신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새로운 신 금송아지를 예배하고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이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 말하고 먹고 마시며 뛰노는 문란한 향연을 벌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백성들이 진멸될 긴박한 위기 가운데 모세의 중보기도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긴 했지만 이미 언약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우상숭배의 죄는 끔찍한 죄입니다. 그것이 중대한 죄인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이 저지른 영적 간음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간음죄에 대해 당사자를 돌로 쳐 죽일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제 후배 중 한 사람이 중매로 결혼을 하고 집들이 초대를 해서 간 적이 있습니다. 함께 식사하며 축하해 주고 돌아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안타깝게 들리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신부가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신부가 결혼하기 전 사귀던 남자를 잊지 못해 쫒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무나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렘 3: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북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란 영적 음행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려버려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지만 남유다까지도 뻔뻔스럽게 그 죄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들을 끝까지 돌이키시기 위해 얼마나 참고 기다리셨는지 모릅니다. 호세아서 3장 1절 보겠습니다.
호 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3: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을 나가 창녀가 되어버린 그의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리고 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비행을 저지른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끝끝내 뉘우치지 않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질 뿐이었습니다. 결국 털끝 같은 희망조차 사라지고 결국 남유다마저 BC 586년에 멸망당하고 맙니다. 마치 이혼서처럼 하나님과의 언약은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자비를 완전히 거두신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오늘 주제는 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이 주제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새 언약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언약의 습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며 갈등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것은 믿고 있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얽매이기 쉬운 죄와 죄책감의 무거운 짐을 지고 피곤하게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의 많은 문제들이 바로 이것에서 비롯됩니다.
 
먼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옛 언약, 혹 다른 말로 첫 언약은 바로 시내산에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말합니다. 즉,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과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언약은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로 금방 깨지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그 언약 파기의 증표로 가지고 내려오던  돌판을 던져 깨뜨려버렸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필사적인 중보로 다시 언약의 갱신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람피운 아내를 다시 받아준 것처럼 하나님은 큰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 후 더욱 놀라운 은혜는 지금까지 그렇게 지독히 속을 썩이던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하나님이 오셔서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성막을 통해서 그들 한 가운데에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짓는 죄를 짐승의 피로써 수시로 속죄 받을 수 있도록 제사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더구나 일 년에 한 번은 마치 집안을 대청소하듯이 미처 해결하지 못한 죄를 대속죄일을 통해 속죄 받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지켜나가지 못했습니다. 우상숭배의 죄로부터 끝까지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던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마침내 이방 국가들에 의해 각각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낫고 더 좋은 대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새 언약이란 것입니다. 렘 31장 31절 말씀입니다.
렘 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1: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의 손을 잡고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그들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일방적으로 깨뜨려버렸지만 다시 새 언약을 맺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옛 언약과는 달리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들, 즉 약속의 언약과는 아예 관계조차 없었던 외인이었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미치는 놀라운 약속인 것입니다. 먼저 옛 언약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히 8장 7절입니다.
히 8: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옛 언약은 첫 언약, 첫 것이고 새 언약은 둘 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첫 언약인 율법은 흠이 있다는 것과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7장 12절에 보면 말씀합니다.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은 완전합니다. 거룩합니다. 의롭고 선합니다. 하지만 죄성을 가진 우리가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에 율법을 지킴으로 우리가 거룩해질 수도 없고 의롭게 될 수도 없고 선하게 될 수도 없고 온전하게 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고 우리를 정죄할 뿐입니다. 따라서 흠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낡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고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율법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구약시대처럼 짐승의 피를 잡아서 죄를 용서받는 그런 제사법이나 또 부정을 입었을 때 정결케 하는 의식법, 그리고 유월절이나 초막절 같은 절기법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으로 그 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적용되었던 민법이나 형법도 그 정신은 살아있지만 오늘날 액면 그대로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이런 법은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 언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수준은 옛 언약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예를 들어 옛 언약에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새 언약에서는 형제를 보고 노하는 자가 심판을 받으며 또 미워하는 자가 살인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옛 언약에서는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만 주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으로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탐심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외면적으로 잘 지키면 특별한 문제가 없었으나 신약의 수준은 마음의 수준까지 거룩함을 요구합니다. 어느 것이 더 어렵습니까? 새 언약의 수준이지요? 그럼, 새 언약에 들어 온 우리는 혹을 떼려다가 더 큰 혹을 붙이게 되는 격이 된 것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새 언약의 놀라운 축복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입니다. 렘 31장입니다.
렘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법을 돌판이 아닌 마음에 기록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마음에 어떻게 기록하시겠다는 것일까요? 고후 3장으로 넘어갑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바로 성령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첫 언약 때는 성령께서 간혹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시기에 임하셨지만 영구히 그들 속에 내주하시진 않으셨습니다. 이제 예수 믿고 새 언약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령님이 마음속에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첫 언약 때는 광야에 성막이 있었고 그 곳에 하나님이 임재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선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씩 반드시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절대 가까이 할 수가 없었고 함부로 들어가다간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동일하신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것, 이것이야 말로 가장 놀라운 새 언약의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무엇을 하실까요? 에스겔서 36장입니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성령님이 하시는 역할은 죄성을 가진 우리가 의지적으로 할 수 없는 그 일을 우리 안에서 가능케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추하고 굳어 있는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럽게 하시며 우리 마음에 새긴 복음의 높은 수준의 삶을 살도록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것은 내 힘과 내 노력, 내 의지로서가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요사이 자녀들이 집을 다 떠나고 부부 둘만 남아 같이 살다보면 이전보다 부딪히는 일이 더 자주 생길 수 있습니다. 저도 아내에게 부족한 점이 많지만 아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마찰이 생길 때 화가 나기보다 반대로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인간적인 감정 때문이 아닐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별로 감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제 눈에 있는 대들보는 잘 보지 못하면서 남 눈 속에 있는 티를 잘 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남의 부족을 보면 더 답답해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게 제 본성입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본성을 거슬려 행동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렇게 하겠다고 제가 굳게 결심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내속에서 나 아닌 어떤 힘에 이끌려 자연스레 행동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런 능력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항상 그런 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목사라고 누구보다 특별히 더 나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별로 없다고 믿습니다. 단지 본성을 꺾으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성령님의 인도 따라 날마다 살아가고자 하는 것뿐이지요. 자, 새 언약의 축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구절입니다.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나를 앎이니라.’ 이것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누구나 차별 없이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새 언약 가운데 있다면 모세 때와 같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벌벌 떨면서 제발 당신이 대신 우리에게 말씀을 전해 달라고 호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함을 누리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죄 사함의 은혜 때문입니다. 구절 뒷부분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를 주목하십시오. 새 언약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죄 사함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혹시 ‘이 말씀은 잘 알고 있는데요?’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심각한 죄를 지었을 때 보통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물론 먼저 하나님께 자백하시겠지요. 그러면 죄책감이 금방 사라지나요? 만일 용서받았다고 믿긴 하지만 만일 계속 죄책감에 눌려있다면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보통 이런 반응을 할 수 있지요. ‘아이고, 이 형편없는 인간아, 넌 어쩔 수 없어.’ 흔히 자기 자신을 탓하고 정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틀림없이 실망하셨을 거야.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실 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면서 그 죄책감과 실망감에서 벗어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심판하지도 않으십니다. 심판과 징계는 다릅니다. 심판은 공의로운 징벌이고 징계는 사랑으로 하는 교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지 않고 징계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죄책감으로 일분일초라도 눌려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겠다고요? 아니지요. 새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은 죄를 짓고 나서 죄책감에 눌려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슬퍼합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 죄가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그로 인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을 때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슬퍼하고 하나님께 대해 죄송한 마음으로 나아가서 진심으로 잘못을 고백하고 돌이킨 후 그냥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가운데 사는 사람은 옛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죄를 짓고 똑같이 실패도 하지만 자신을 더 이상 정죄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더 이상 죄책감이나 정죄감에 눌려 지내진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죄에 대해 고발하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정죄하지 않으신데 왜 내가 나를 정죄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죄를 진심으로 고백한 후에 금방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유함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새 언약 가운데 살아가는 삶의 특징인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요코이라는 일본군이 전쟁이 이미 끝난 줄도 모르고 괌의 정글 속에서 스스로 만든 지하 방공호에서 28년 동안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2년 1월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강가로 갔다가 현지의 새우잡이 어부에게 발견되어 일본으로 송환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나무껍질로 원시인들이 입었던 누더기 수준으로 옷을 기워 입었고 게, 생선, 나무열매, 새, 야생동물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면서 눈에 띄지 않도록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을 파서 살았습니다. 몇 년 후 미군 전단을 통해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았지만 그는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포로가 되느니 자살해라' 라는 과거 상부의 명령 때문에 그는 귀국할 때까지도 벌벌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미군에게 잡혔다고 생각하고 조사가 끝나면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것에 공포감을 느꼈기 때문이랍니다. 그가 비참한 생활을 계속했던 이유는 이미 과거가 된 옛 상관의 명령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옛 세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예수 믿고 새 언약 아래에 이미 들어왔지만 아직도 옛 언약인 율법의 영향아래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무서워하며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날마다 죄책감의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를 짓고 나서 몇 번이나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자백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아 너희 죄를 기억하지도 않겠다는 새 언약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채 죄책감 가운데 혼자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남은 일생을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리라’는 새 언약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새언약의 기초는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 새언약 안에서 진정한 죄사함의 기쁨을 누리시고 죄책감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날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안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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