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보다 무릎으로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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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7-27 13:26 조회6,158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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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33: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33: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한국 교회는 지금 이러나저러나 위기 상황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코로나로 인한 예배 규제에 대해 논란이 많습니다. 식사, 소그룹 모임, 성경공부, 심지어 성가대 연습까지 금지하고 어길 시 처벌 규정까지 만든 상황은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더구나 최근에 몇 국회의원에 의해 발의된 차별금지법 역시 심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개별적 차별금지법이나 국가인권위원회법등을 통해서 보호되고 있는 상황에서 구태여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법제화하고자 하는 이유의 가장 큰 핵심은 보다 더 강력한 처벌적 규정을 넣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이 법이 만일 통과되면 동성애가 죄라는 것, 신천지가 이단이라는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할 세상이 언젠가 오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위기나 문제도 먼저 무릎으로, 기도로 싸워야 합니다. 물론 필요할 때는 침묵하기보다 정당한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상세한 내용은 목회칼럼에 올렸으니 참고하시고 관심 있으시면 인터넷에도 많은 자료가 올라와 있으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몇 주 전 예배 마치고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던 중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는지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어쨌든 그 준비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계속하다보면 노하우가 쌓여서 더 쉬워질 것 같은데 현실은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 할수록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삶을 표현하기 때문이지요. 또 설교 준비가 어려운 이유는 설교를 통해서 삶이 변했다는 분들을 만나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대다수의 목회자가 토로하는 고민거리이기도 합니다. 사실 월요일부터 주일 예배 시작될 때까지 계속 설교에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지만 이런저런 문제를 생각하면 설교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자신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설교자가 말씀을 연구할 기회와 시간이 훨씬 많기에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제일 많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목회자의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설교에 대한 주제가 아닙니다. 설교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꺼낸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제 개인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쉬운 것 같지만 할수록 어렵습니다. 설교 준비하느라 주일 새벽까지 붙들고 씨름할 때가 드물게 있지만 기도는 그렇게 잘 안됩니다. 이것이 제 자신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제가 속한 선교단체의 선배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자세히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는 어떻게 드리는 것인지 배웠습니다. 기도에 대한 책도 같이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가진 신앙 서적 중에서 가장 많은 종류가 바로 기도에 관한 책일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많이 애용한 책은 EM 바운즈라는 분이 쓴 ‘기도의 능력’이란 책입니다. 기도에 관한 고전처럼 여겼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도전을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 책의 첫 머리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기계나 더 좋은 기계도 아니요 새로운 조직도 아니요, 기발한 방법도 아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령이 쓰실 수 있는 사람, 즉 기도의 사람, 기도에 능한 사람이다. 성경은 방법을 통해서 흘러나오지 않고 사람을 통해 역사한다. 그것도 기도의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내용이 또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같은 설교자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지요. '설교는 한 시간 동안 하는 공연이 아니다. 설교는 삶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한 편의 설교를 만드는 데는 20년이 걸린다. 그 사람을 만드는데 2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참된 설교는 골방에서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사람은 골방에서 만들어진다. 그의 삶과 그의 가장 깊은 확신들은 그와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에서 태어난다. 기도는 사람을 만든다. 기도는 목사를 만든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설교는 기도로 만들어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제가 캠퍼스 다닐 때 매섭게 추운 겨울 새벽에 형제들과 같이 가까운 뒷산에 올라가서 벌벌 떨며 마치 고행하는 기분으로 기도할 때가 기억납니다. 며칠 배고픔을 참고 금식기도를 도전해 본적도 있습니다. 친구랑 어두운 밤에 산꼭대기 바위위에 올라가서 새벽까지 기도해 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도를 하면서 하늘이 열리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뭔가 굉장하거나 드라마틱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때로 같은 제목을 가지고 수년 동안 기도하면서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 과연 계속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들 때도 있었습니다. 윌리엄 거닐이란 분이 이런 말을 남겼더군요.
‘어떤 기도는 다른 기도에 비해 더 먼 여행을 하지만 돌아올 때는 더 풍성한 짐을 싣고 온다. 그것은 응답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영혼이 승리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포기하지 않고 인내로 기도하고 기다린 만큼 더 풍성한 응답을 주실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같은 소망은 기도의 불씨에 불을 붙이는 강력한 동기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영적 생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꼽으라면 기도를 뽑을 것 같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첫 째가 기도요, 둘째도 기도요, 셋째도 기도란 말을 했지만 저도 동감입니다. 저는 설교가 사람을 바꾸지 못해도 기도가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과 역사가 수없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한 것은 모세가 생명을 걸고 드린 중보기도였습니다. 어둡고 소망을 잃어가던 사사시대 말엽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게 한 사무엘의 탄생도 어머니 한나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아들에 대한 소망을 기도로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0절입니다.
삼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그녀의 눈물의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그 영향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로 이어졌습니다. 히스기야왕 시대에 앗수르의 침입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왕이 옷을 찢고 베옷을 입은 채 하나님의 전에 나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또 그가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생명이 15년간 연장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의 통곡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가 흘린 기도의 눈물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뽑히는 어거스틴이 방탕하고 타락한 생활에서 돌아와 기독교계의 별이 된 것은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머니를 속이고 로마로 갔다가 다시 밀라노에 갔을 때 그의 소식을 접한 어머니 모니카가 그곳까지 찾아가서 밀라노 감독이었던 암브로스를 만납니다. 모니카가 아들을 만나달라고 간청했을 때 암브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될 테니 돌아가십시오. 눈물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녀는 살아생전에 아들의 회심을 목격했고 아들의 품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면 그것은 오직 아버지께서 제게 이런 어머니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달라붙어서 무진 애를 썼지만 오히려 무기력함과 무능력만 보이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그 아이에게 귀신을 쫒아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자기들은 왜 해결하지 못했는지 여쭙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 어떤 문제는 기도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 불침번을 영적 생명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불침번은 기도 시간인데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교회 성도들 이름 하나하나를 하나님 앞에 부르지 못하면 꼭 죄를 짓는 것 같은 부담감이 찾아옵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2장 23절입니다.
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기도하지 않는 것을 왜 죄라고 하실까요? 그것은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므로 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기도하지 않음으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을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육신을 의지하며 살게 되기 때문이지요. 기도는 이것저것 해 보다가 정 안되면 그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던 처음부터 끝까지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가짜고 부활 없는 죽음은 거짓이며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처럼 기도 없는 신앙도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33장은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사역하던 시기는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였습니다. 유다는 약 1년 이상 바벨론에 의해 포위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재난은 유다백성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했고 하나님의 성전을 가증스러운 우상으로 더럽혔으며 힌놈의 골짜기는 그들의 아들딸들을 몰렉에게 인신 제물로 바치는 도살장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했습니다. 항복하면 살고 거부하면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시드기야왕을 붙잡아 끌고 갈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시드기야왕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반역죄로 가두었습니다.
그 감금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3: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란 이름은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행하신다, 만든다, 성취한다는 단어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일을 행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렘 2장 32절입니다.
렘 2:32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향해 너희의 죄를 자복하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목을 굳게 하고 거역함으로 사실상 모든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긍휼이 풍성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시고 버리신다면 기도하라고 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것입니다. 애 3장 22-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애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라 해도 기도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다는 말은 절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언제 절규하게 되지요? 큰 슬픔을 당했거나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맞을 때입니다. 사사기 15장에 보면 삼손이 레히라는 곳에서 나귀의 턱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이고 나서 너무 목이 말랐습니다. 자칫 블레셋사람들의 포로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께 목말라 죽겠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부르짖었다고 하는 말이 내게 부르짖으라고 하신 단어와 같습니다. 부르짖는 것은 마치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러 물을 달라고 절규하는 것처럼 부르짖으라는 말씀입니다. 부르짖는다는 말은 그만큼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특별히 기도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간절함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는 하지만 응답을 잘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박함이 없이 때문입니다. 간절함이나 절박함이 없으면 기도하더라도 형식적이 되거나 기도하고는 돌아서서 바로 잊어버리기가 일쑤입니다. 따라서 응답을 별로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유대의 멸망이었습니다. 메시지를 전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왕을 비롯한 동족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멸망으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을 볼 때 마치 벽에다 소리치는 것처럼 정말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처럼 많은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네가 일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일 것이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는 시위대 뜰안에 감금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감금된 상태에서 구해 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크고 비밀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모든 것이 끝인 것 같이 보이지만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죄악으로 망하겠지만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만국 앞에서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구원과 회복, 그리고 메시아를 통해서 정의와 공평이 실현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의 말씀을 보여주신 것이 예레미야가 자유의 몸이 되는 것보다 더 소중했을까요? 맞습니다. 꿈과 소망이 없으면 망하게 됩니다. 소망이 있으면 삽니다. 이런 크고 비밀한 일은 아무나 알 수가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오직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에게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처럼 끝인 것 같은 지점에서 새로운 길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막
제가 목회를 시작하면서 몇 차례 고비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정말 목회를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진 적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했고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 저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기분이었습니다. 엄청난 자괴감과 실망감에 빠져 거친 표현을 쓴다면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굳어져갔습니다. 그날 밤 괴로운 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기도원에 좀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 제 마음에 신기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마치 분노와 절망의 파도로 출렁이던 홍해바다가 마치 갈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품고 있던 섭섭함, 좌절감, 미운 감정도 모두 마치 바닷물에 휩쓸러 가듯이 서서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 스스로 없애려고 애쓴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아니 할 수도 없었습니다. 환경이나 주위 사람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주위가 변한 것이 아니라 제가 변한 것, 하나님께서 제 마음의 모든 짐을 가져가 주신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제게는 더 크고 비밀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부터 저는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이 죽습니다. 제 친구 어머니 한 분이 떡을 드시다가 갑자기 목에 걸리는 바람에 질식사 하실 뻔 했습니다. 마침 구급대가 빨리 와서 조치를 취해서 사셨지만 시간이 조금 늦어서 뇌 손상이 생기고 호흡기 문제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해서 인공적으로 목에 있는 기도를 뚫었습니다. 기도가 막히면 영적으로 질식하게 됩니다. 기도를 막는 것은 죄입니다. 마치 죄가 떡처럼 기도에 들어붙어 영혼의 호흡을 막습니다. 죄는 가능한 빨리 떨어내야 합니다. 회개를 통해서 말입니다. 기도가 있음으로 우리가 호흡해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 영혼이 살기 위함입니다. 기도하십시다. 부르짖읍시다. 몸은 기도를 저항합니다. 육신은 기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도보다 활동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몸이 내 삶을 주관하게 될 것입니다. 몸이 주관하면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지으면 기도가 막힙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크고 비밀한 일이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비록 환경은 바뀌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아도, 상황은 도리어 악화되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고 만드시고 성취하시는 창조주이시며 신실하신 아버지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 무릎으로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각자에게 보여주시길 원하시는 크고 비밀한 일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3: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한국 교회는 지금 이러나저러나 위기 상황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코로나로 인한 예배 규제에 대해 논란이 많습니다. 식사, 소그룹 모임, 성경공부, 심지어 성가대 연습까지 금지하고 어길 시 처벌 규정까지 만든 상황은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더구나 최근에 몇 국회의원에 의해 발의된 차별금지법 역시 심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개별적 차별금지법이나 국가인권위원회법등을 통해서 보호되고 있는 상황에서 구태여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법제화하고자 하는 이유의 가장 큰 핵심은 보다 더 강력한 처벌적 규정을 넣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이 법이 만일 통과되면 동성애가 죄라는 것, 신천지가 이단이라는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할 세상이 언젠가 오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위기나 문제도 먼저 무릎으로, 기도로 싸워야 합니다. 물론 필요할 때는 침묵하기보다 정당한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상세한 내용은 목회칼럼에 올렸으니 참고하시고 관심 있으시면 인터넷에도 많은 자료가 올라와 있으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몇 주 전 예배 마치고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던 중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는지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어쨌든 그 준비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계속하다보면 노하우가 쌓여서 더 쉬워질 것 같은데 현실은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 할수록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삶을 표현하기 때문이지요. 또 설교 준비가 어려운 이유는 설교를 통해서 삶이 변했다는 분들을 만나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대다수의 목회자가 토로하는 고민거리이기도 합니다. 사실 월요일부터 주일 예배 시작될 때까지 계속 설교에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지만 이런저런 문제를 생각하면 설교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자신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설교자가 말씀을 연구할 기회와 시간이 훨씬 많기에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제일 많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목회자의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설교에 대한 주제가 아닙니다. 설교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꺼낸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제 개인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쉬운 것 같지만 할수록 어렵습니다. 설교 준비하느라 주일 새벽까지 붙들고 씨름할 때가 드물게 있지만 기도는 그렇게 잘 안됩니다. 이것이 제 자신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제가 속한 선교단체의 선배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자세히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는 어떻게 드리는 것인지 배웠습니다. 기도에 대한 책도 같이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가진 신앙 서적 중에서 가장 많은 종류가 바로 기도에 관한 책일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많이 애용한 책은 EM 바운즈라는 분이 쓴 ‘기도의 능력’이란 책입니다. 기도에 관한 고전처럼 여겼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도전을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 책의 첫 머리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기계나 더 좋은 기계도 아니요 새로운 조직도 아니요, 기발한 방법도 아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령이 쓰실 수 있는 사람, 즉 기도의 사람, 기도에 능한 사람이다. 성경은 방법을 통해서 흘러나오지 않고 사람을 통해 역사한다. 그것도 기도의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내용이 또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같은 설교자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지요. '설교는 한 시간 동안 하는 공연이 아니다. 설교는 삶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한 편의 설교를 만드는 데는 20년이 걸린다. 그 사람을 만드는데 2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참된 설교는 골방에서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사람은 골방에서 만들어진다. 그의 삶과 그의 가장 깊은 확신들은 그와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에서 태어난다. 기도는 사람을 만든다. 기도는 목사를 만든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설교는 기도로 만들어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제가 캠퍼스 다닐 때 매섭게 추운 겨울 새벽에 형제들과 같이 가까운 뒷산에 올라가서 벌벌 떨며 마치 고행하는 기분으로 기도할 때가 기억납니다. 며칠 배고픔을 참고 금식기도를 도전해 본적도 있습니다. 친구랑 어두운 밤에 산꼭대기 바위위에 올라가서 새벽까지 기도해 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도를 하면서 하늘이 열리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뭔가 굉장하거나 드라마틱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때로 같은 제목을 가지고 수년 동안 기도하면서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 과연 계속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들 때도 있었습니다. 윌리엄 거닐이란 분이 이런 말을 남겼더군요.
‘어떤 기도는 다른 기도에 비해 더 먼 여행을 하지만 돌아올 때는 더 풍성한 짐을 싣고 온다. 그것은 응답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영혼이 승리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포기하지 않고 인내로 기도하고 기다린 만큼 더 풍성한 응답을 주실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같은 소망은 기도의 불씨에 불을 붙이는 강력한 동기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영적 생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꼽으라면 기도를 뽑을 것 같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첫 째가 기도요, 둘째도 기도요, 셋째도 기도란 말을 했지만 저도 동감입니다. 저는 설교가 사람을 바꾸지 못해도 기도가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과 역사가 수없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한 것은 모세가 생명을 걸고 드린 중보기도였습니다. 어둡고 소망을 잃어가던 사사시대 말엽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게 한 사무엘의 탄생도 어머니 한나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아들에 대한 소망을 기도로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0절입니다.
삼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그녀의 눈물의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그 영향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로 이어졌습니다. 히스기야왕 시대에 앗수르의 침입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왕이 옷을 찢고 베옷을 입은 채 하나님의 전에 나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또 그가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생명이 15년간 연장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의 통곡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가 흘린 기도의 눈물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뽑히는 어거스틴이 방탕하고 타락한 생활에서 돌아와 기독교계의 별이 된 것은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머니를 속이고 로마로 갔다가 다시 밀라노에 갔을 때 그의 소식을 접한 어머니 모니카가 그곳까지 찾아가서 밀라노 감독이었던 암브로스를 만납니다. 모니카가 아들을 만나달라고 간청했을 때 암브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될 테니 돌아가십시오. 눈물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녀는 살아생전에 아들의 회심을 목격했고 아들의 품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면 그것은 오직 아버지께서 제게 이런 어머니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달라붙어서 무진 애를 썼지만 오히려 무기력함과 무능력만 보이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그 아이에게 귀신을 쫒아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자기들은 왜 해결하지 못했는지 여쭙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 어떤 문제는 기도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 불침번을 영적 생명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불침번은 기도 시간인데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교회 성도들 이름 하나하나를 하나님 앞에 부르지 못하면 꼭 죄를 짓는 것 같은 부담감이 찾아옵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2장 23절입니다.
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기도하지 않는 것을 왜 죄라고 하실까요? 그것은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므로 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기도하지 않음으로 짓는 죄가 얼마나 많을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육신을 의지하며 살게 되기 때문이지요. 기도는 이것저것 해 보다가 정 안되면 그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던 처음부터 끝까지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가짜고 부활 없는 죽음은 거짓이며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처럼 기도 없는 신앙도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33장은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사역하던 시기는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였습니다. 유다는 약 1년 이상 바벨론에 의해 포위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재난은 유다백성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했고 하나님의 성전을 가증스러운 우상으로 더럽혔으며 힌놈의 골짜기는 그들의 아들딸들을 몰렉에게 인신 제물로 바치는 도살장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했습니다. 항복하면 살고 거부하면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시드기야왕을 붙잡아 끌고 갈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시드기야왕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반역죄로 가두었습니다.
그 감금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3: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란 이름은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행하신다, 만든다, 성취한다는 단어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일을 행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렘 2장 32절입니다.
렘 2:32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향해 너희의 죄를 자복하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목을 굳게 하고 거역함으로 사실상 모든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긍휼이 풍성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시고 버리신다면 기도하라고 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것입니다. 애 3장 22-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애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라 해도 기도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다는 말은 절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언제 절규하게 되지요? 큰 슬픔을 당했거나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맞을 때입니다. 사사기 15장에 보면 삼손이 레히라는 곳에서 나귀의 턱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이고 나서 너무 목이 말랐습니다. 자칫 블레셋사람들의 포로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께 목말라 죽겠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부르짖었다고 하는 말이 내게 부르짖으라고 하신 단어와 같습니다. 부르짖는 것은 마치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러 물을 달라고 절규하는 것처럼 부르짖으라는 말씀입니다. 부르짖는다는 말은 그만큼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특별히 기도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간절함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는 하지만 응답을 잘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박함이 없이 때문입니다. 간절함이나 절박함이 없으면 기도하더라도 형식적이 되거나 기도하고는 돌아서서 바로 잊어버리기가 일쑤입니다. 따라서 응답을 별로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유대의 멸망이었습니다. 메시지를 전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왕을 비롯한 동족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멸망으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을 볼 때 마치 벽에다 소리치는 것처럼 정말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처럼 많은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네가 일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일 것이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는 시위대 뜰안에 감금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감금된 상태에서 구해 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크고 비밀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모든 것이 끝인 것 같이 보이지만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죄악으로 망하겠지만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만국 앞에서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구원과 회복, 그리고 메시아를 통해서 정의와 공평이 실현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의 말씀을 보여주신 것이 예레미야가 자유의 몸이 되는 것보다 더 소중했을까요? 맞습니다. 꿈과 소망이 없으면 망하게 됩니다. 소망이 있으면 삽니다. 이런 크고 비밀한 일은 아무나 알 수가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오직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에게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처럼 끝인 것 같은 지점에서 새로운 길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막
제가 목회를 시작하면서 몇 차례 고비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정말 목회를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진 적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했고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 저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기분이었습니다. 엄청난 자괴감과 실망감에 빠져 거친 표현을 쓴다면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굳어져갔습니다. 그날 밤 괴로운 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기도원에 좀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 제 마음에 신기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마치 분노와 절망의 파도로 출렁이던 홍해바다가 마치 갈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품고 있던 섭섭함, 좌절감, 미운 감정도 모두 마치 바닷물에 휩쓸러 가듯이 서서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 스스로 없애려고 애쓴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아니 할 수도 없었습니다. 환경이나 주위 사람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주위가 변한 것이 아니라 제가 변한 것, 하나님께서 제 마음의 모든 짐을 가져가 주신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제게는 더 크고 비밀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부터 저는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이 죽습니다. 제 친구 어머니 한 분이 떡을 드시다가 갑자기 목에 걸리는 바람에 질식사 하실 뻔 했습니다. 마침 구급대가 빨리 와서 조치를 취해서 사셨지만 시간이 조금 늦어서 뇌 손상이 생기고 호흡기 문제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해서 인공적으로 목에 있는 기도를 뚫었습니다. 기도가 막히면 영적으로 질식하게 됩니다. 기도를 막는 것은 죄입니다. 마치 죄가 떡처럼 기도에 들어붙어 영혼의 호흡을 막습니다. 죄는 가능한 빨리 떨어내야 합니다. 회개를 통해서 말입니다. 기도가 있음으로 우리가 호흡해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 영혼이 살기 위함입니다. 기도하십시다. 부르짖읍시다. 몸은 기도를 저항합니다. 육신은 기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도보다 활동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몸이 내 삶을 주관하게 될 것입니다. 몸이 주관하면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지으면 기도가 막힙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크고 비밀한 일이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비록 환경은 바뀌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아도, 상황은 도리어 악화되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고 만드시고 성취하시는 창조주이시며 신실하신 아버지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 무릎으로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각자에게 보여주시길 원하시는 크고 비밀한 일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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