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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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ong 작성일18-09-02 07:45 조회7,097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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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산다는 것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일본사람들이 도저히 우리를 따를 수 없다고 부러워하는 다섯 가지가 있답니다. 첫째는 삼성전자이죠. 처음에는 일본으로 배우러갔다가 이제는 일본을 저만큼이나 추월해버린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몇 해 전부터 일본에 있는 전자 회사들 전체 이익을 합한 것보다 삼성전자의 수익이 더 높아서 일본사람들이 도저히 따라잡기 어려운 회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인천공항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여행을 와서 인천공항에 내리면 한국에 대한 인식이 싹 바뀐다 합니다. 하기야 인천공항이 세계 공항 평가에서 10년째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럴 만하지요. 셋째는 여자 골프입니다. 여자 골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넷째는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WiFi network입니다. 한국의 인터넷망이 세계 제일인 점은 이미 알려진지 오래지요. 저 구석 시골 여관방에서도 와이파이가 쉽게 잡힐 정도로 세계 1등이 한국의 전산망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는 뭘까요? 놀랍게도 한국 아줌마들의 파워랍니다. 일본 여성들은 순종형으로 자라서 늘 착하고 순하지만 한국 아줌마들은 결혼하고 나면 방목형이 되어 거칠고 야성적이 됩니다. 단체로 몰려다니며 목소리도 높고 행동에도 거침이 없어 일본사람들은 한국 아줌마 패거리를 만나면 그냥 피해 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지난 주 휴일 아침 일찍 운동 삼아 아파트 뒤에 있는 산에 올랐는데 그날따라 등산객들이 많았습니다. 올라가다가 산 중턱 길옆에 마련된 쉼터에 앉아있는데 나이 지긋한 한국 아줌마 셋이서 오더니 걸터앉아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한 아줌마가 그럽디다. 나는 교회나 절에 나가 앉아 있으면 잠만 오더라. 어떤 말 잘하는 스님 이야기에 정신 차린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교회에 가도 믿음이 안 생기더라....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갑자기 귀가 번쩍 떠졌습니다. 그리고 당장 그 이야기에 끼어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길옆에 사람들도 많이 다니는데다가 목소리 큰 아줌마가 셋이라 도저히 자신 없어서 머뭇머뭇하다가 그만 내려와 버렸지요. 내려오는 길에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믿고 싶어도 도무지 믿음이 안 생기더라고 들었을 때 퍼뜩 떠 오른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당장 믿어지지 않더라도 자꾸 들으셔야 합니다. 자꾸 듣다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기 때문이지요. 자 다시 잘 들어보세요. 성경은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이렇게 세 명의 아줌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끝내 하지 못하고 말았죠.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생깁니다.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내 믿음이 자랐으면 좋겠다. 나도 누구처럼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다.’면서 강한 믿음을 원하지만 말씀을 가까이 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공부하거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서 믿음이 자랄 수 있을까요? 몸도 음식을 먹어야 자라는데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어떻게 믿음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디엘 무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런데 나는 믿음이 어느 날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뚝 떨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믿음은 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 10장 17절을 읽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을 보자 지금까지 내가 성경을 덮어놓고 믿음을 위하여 기도했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이후 성경을 공부하는 동안 내 믿음이 줄곧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분, 정말 믿음의 성장을 소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매일 식사를 빠뜨리지 않는 것만큼이나 시간을 내어 성경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인 만남에서든, 사랑방 모임에서든 자주 다른 사람들과 말씀을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나누는 것은 서로의 믿음을 세우는데 유익합니다.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생각과 입술에 머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믿음은 더욱 자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믿음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먼저 에베소서 2장 8절을 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가장 먼저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외에는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방법이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죄 씻음을 받아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믿음은 중요합니다.
믿음이란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살아갈 새로운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과 끝입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는 보이는 세계만 보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믿고 난 후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영원하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곳임을 알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고 살자면 믿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오래전에 신부가 가마를 타고 가던 전통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가마를 들고 가는 가마꾼은 가마에 가려져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앞의 가마꾼이 가는대로 믿음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어떤 믿음일까요? “앞에 지고 가는 가마꾼이 틀림없이 잔칫집으로 잘 가고 있을 거야, 그리고 잔칫집에 도착하면 두둑한 수고비와 잔칫상을 받겠지” 이처럼 앞이 보이지도 않고 또 수고비를 받은 것도 아니지만 소망을 품고 믿음으로 따라가는 가마꾼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세상을 이긴다는 말의 전제는 우리가 세상과 싸우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은 우리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상으로 번역된 헬라어 코스모스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가 있다면 첫 째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을 포함한 만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땅과 싸울 이유는 없습니다. 또 하나는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 나오듯이 세상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싸울 이유는 더욱이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할 세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대적 마귀가 지배하고 조종하고 있는 타락한 가치 체계입니다.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죄를 짓게 만드는 모든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입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은 바로 육신의 정욕, 소유욕, 명예욕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마귀는 이런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극도로 굶주리신 상태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 받으신 시험이 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한 유혹이었습니다. 먼저 주릴 대로 주리신 예수님께 마귀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너의 능력을 마음대로 한 번 사용해 보아라고 마귀가 시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호히 거절하심으로 육신의 욕구에 굴복하도록 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다음에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이 안 다치도록 보호하실 터이니 한 번 뛰어내려보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이 사뿐히 지상에 착지하시는 순간 아마 그 광경을 목격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놀라고 환호하게 될 것이고 일약 스타로 떠오를 것입니다. 이것은 이생의 자랑, 즉 명예욕을 시험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만약 자기에게 절하고 경배하면 눈에 보이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하지요. 이것은 안목의 정욕, 즉 소유욕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실 때마다 똑같이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대적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주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유혹을 대적하시고 이기셨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사단과 세상의 공격과 유혹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단과 세상에 대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요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요 또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한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의 삶은 보이지 않는 곳에 소망을 두는 삶입니다. 사실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천국도 보이지 않습니다. 육의 세계는 보이나 영적인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 소망입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 예배를 마치고 제주에 잠시 살게 된 둘 째 딸 부부를 잠간 만나기 위해 김해 공항으로 갔습니다. 오후 5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라 시간이 충분해 여유 있게 출발했는데 가는 도중 긴급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보니 기상 악화로 인해 수속이 중단되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받아본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공항에 도착해 하염없이 전광판을 보며 기다렸습니다. 전광판에는 계속 다른 비행편도 수속 중단, 또는 결항이 되었다는 메시지가 뜨고 있었지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소망을 품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잔잔케 하실 수 있사오니 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운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저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소망과 믿음을 두고 기다리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단지 소망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 반드시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낫기를 바라는 바람으로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기도도 응답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소망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도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응답하지 않으시는 편이 최선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응답되는 것도 믿음이지만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감사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비행기를 탈 수 있어도 감사하고 결국 못 타게 되어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받으며 감사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제 경우는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타게 되었습니다. 좀 늦어지긴 했지만 몇 시간 후에 비행기가 뜨게 되어 무사히 잘 갔다 왔습니다.
우리는 너무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통장에 잔고가 있어야 안심합니다. 눈에 개수가 보이고 확인이 되어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빈들에서 사역하실 때 날이 저물자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불쌍히 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대답했지요. 눈에 보이는 것, 카운트 되는 것만 신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고 결코 카운트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보이는 것에 있습니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에 있습니까? 보이는 것은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언젠가 지나가버릴 육체의 쾌락과 소유와 명예에 소망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삶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안식과 하늘에 간직하신 영원한 기업과 하나님이 주실 영광에 늘 마음과 생각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모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자란 젊은 시절에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쾌락을 즐기며 넘치는 소유와 명예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했을까요?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먼저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이해가지 않는 어리석은 결정이었습니다. 그의 위치는 왕위도 바라 볼 수 있는 서열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로열패밀리의 신분에 따른 명예를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믿음을 사는 삶의 특징은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갈채와 인기, 찬사와 명예를 아낌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지요? 하나님이 주실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비교할 수 없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아무리 큰 명예라 해도 세월이 흐르면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와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세상 명예를 분토처럼 버린 것,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명예를 버렸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을 잠시 죄악의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죄를 짓는 것도 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의 즐거움일 뿐 그 후에는 더 길고 아픈 고통이 따라옵니다. 죄악은 잠시 달콤하지만 그 쓴 맛은 지속됩니다. 믿음의 삶은 잠시 누릴 육체의 쾌락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백성과 받는 고난을 기꺼이 선택합니다. 비록 현재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앞에 있는 영원한 기쁨을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 믿음으로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다음 구절입니다.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소유로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근대에 발견되는 고대 이집트 왕가의 유물의 가치는 지금도 어마어마한데 당시 모세가 가질 수 있는 재물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선택했습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값진 재물을 다 긁어모은다 한들 천국에 있는 극히 작은 하나님의 상보다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것은 단 하나도 천국으로 가져갈 수 없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끝에 받을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애굽의 모든 보화에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았던 모세의 삶은 뚜렷합니다. 그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세상에 속한 것을 아낌없이 버렸습니다. 죄의 낙, 육체의 쾌락을 버렸고 애굽의 보화, 모든 소유를 버렸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명예를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마치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명예를 비롯한 모든 세상의 것을 마치 배설물처럼 여겼듯이 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보이지 않는 소망을 위해 눈에 보이는 세상의 쾌락과 소유와 명예를 과감히 버리는 것입니다. 거절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대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과 수모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 주심을 마라보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마지막으로 윌리엄 보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하고 마치겠습니다.
윌리엄 보덴, 그는 1887년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큰 목장을 경영하는 대부호였습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부모가 그에게 세계 여행을 시켰는데 혼자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를 둘러보면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때 그는 마음의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이 불쌍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일에 내 평생을 바치리라.” 그리고는 그는 자기의 성경책 표지 안쪽에 이렇게 적어 넣었습니다. ‘No Reserve.’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미국의 명문인 예일대학을 졸업한 뒤 프린스턴 신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 부모님이 그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지만 그는 이슬람 선교를 위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선교를 위해 이집트로 건너갔습니다. 친지와 친구들은 “왜 하필이면 그곳에 가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고 말렸지만 그때 그는 성경 표지 안쪽에 또 한 마디의 말을 더 기록했습니다. ‘No Retreat.’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에서 사역한지 넉 달도 채 되지 않아서 그만 뇌막염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발병한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자기의 성경표지 안쪽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 남겼습니다. ‘No Regret.’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No Reserve, No Retreat, No Regret.’ ‘주님을 위해 이 땅에 결코 남겨두지 않고 절대 물러서지 않고 후퇴하지 않으리’ 믿음의 삶을 이처럼 짧고 분명하게 잘 표현한 문구도 드물 것입니다. 원하기만 했다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던 세상의 쾌락과 소유욕, 명예욕을 과감하게 버리고 짧은 생애를 살았던 그는 이집트 카이로에 묻혔습니다. 그의 먼지 덮인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윌리엄 보덴(1887~1913),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떠나서는 그의 삶을 설명할 길이 없다.’
비록 26세라는 짧은 일기로 꿈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값진 생애였습니다. 왜냐구요?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자였습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모세와 같이, 바울과 같이 윌리엄 보덴과 같이, 수도 없이 먼저 간 믿음의 선배들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고 세상이 주는 육신의 정욕과 소유욕과 명예욕을 거절하고 포기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수모를 선택하여 남은 생애를 사신다면 반드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자가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세상과 친구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이긴 자로써 사시겠습니까?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일본사람들이 도저히 우리를 따를 수 없다고 부러워하는 다섯 가지가 있답니다. 첫째는 삼성전자이죠. 처음에는 일본으로 배우러갔다가 이제는 일본을 저만큼이나 추월해버린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몇 해 전부터 일본에 있는 전자 회사들 전체 이익을 합한 것보다 삼성전자의 수익이 더 높아서 일본사람들이 도저히 따라잡기 어려운 회사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인천공항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여행을 와서 인천공항에 내리면 한국에 대한 인식이 싹 바뀐다 합니다. 하기야 인천공항이 세계 공항 평가에서 10년째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럴 만하지요. 셋째는 여자 골프입니다. 여자 골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넷째는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WiFi network입니다. 한국의 인터넷망이 세계 제일인 점은 이미 알려진지 오래지요. 저 구석 시골 여관방에서도 와이파이가 쉽게 잡힐 정도로 세계 1등이 한국의 전산망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는 뭘까요? 놀랍게도 한국 아줌마들의 파워랍니다. 일본 여성들은 순종형으로 자라서 늘 착하고 순하지만 한국 아줌마들은 결혼하고 나면 방목형이 되어 거칠고 야성적이 됩니다. 단체로 몰려다니며 목소리도 높고 행동에도 거침이 없어 일본사람들은 한국 아줌마 패거리를 만나면 그냥 피해 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지난 주 휴일 아침 일찍 운동 삼아 아파트 뒤에 있는 산에 올랐는데 그날따라 등산객들이 많았습니다. 올라가다가 산 중턱 길옆에 마련된 쉼터에 앉아있는데 나이 지긋한 한국 아줌마 셋이서 오더니 걸터앉아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한 아줌마가 그럽디다. 나는 교회나 절에 나가 앉아 있으면 잠만 오더라. 어떤 말 잘하는 스님 이야기에 정신 차린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교회에 가도 믿음이 안 생기더라....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갑자기 귀가 번쩍 떠졌습니다. 그리고 당장 그 이야기에 끼어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길옆에 사람들도 많이 다니는데다가 목소리 큰 아줌마가 셋이라 도저히 자신 없어서 머뭇머뭇하다가 그만 내려와 버렸지요. 내려오는 길에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믿고 싶어도 도무지 믿음이 안 생기더라고 들었을 때 퍼뜩 떠 오른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당장 믿어지지 않더라도 자꾸 들으셔야 합니다. 자꾸 듣다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기 때문이지요. 자 다시 잘 들어보세요. 성경은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이렇게 세 명의 아줌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끝내 하지 못하고 말았죠.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생깁니다.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내 믿음이 자랐으면 좋겠다. 나도 누구처럼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다.’면서 강한 믿음을 원하지만 말씀을 가까이 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공부하거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서 믿음이 자랄 수 있을까요? 몸도 음식을 먹어야 자라는데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어떻게 믿음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디엘 무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런데 나는 믿음이 어느 날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뚝 떨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믿음은 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 10장 17절을 읽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을 보자 지금까지 내가 성경을 덮어놓고 믿음을 위하여 기도했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이후 성경을 공부하는 동안 내 믿음이 줄곧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분, 정말 믿음의 성장을 소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매일 식사를 빠뜨리지 않는 것만큼이나 시간을 내어 성경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인 만남에서든, 사랑방 모임에서든 자주 다른 사람들과 말씀을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나누는 것은 서로의 믿음을 세우는데 유익합니다.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생각과 입술에 머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믿음은 더욱 자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믿음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먼저 에베소서 2장 8절을 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가장 먼저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외에는 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방법이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죄 씻음을 받아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믿음은 중요합니다.
믿음이란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살아갈 새로운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과 끝입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는 보이는 세계만 보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믿고 난 후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영원하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곳임을 알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고 살자면 믿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오래전에 신부가 가마를 타고 가던 전통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가마를 들고 가는 가마꾼은 가마에 가려져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앞의 가마꾼이 가는대로 믿음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어떤 믿음일까요? “앞에 지고 가는 가마꾼이 틀림없이 잔칫집으로 잘 가고 있을 거야, 그리고 잔칫집에 도착하면 두둑한 수고비와 잔칫상을 받겠지” 이처럼 앞이 보이지도 않고 또 수고비를 받은 것도 아니지만 소망을 품고 믿음으로 따라가는 가마꾼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세상을 이긴다는 말의 전제는 우리가 세상과 싸우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은 우리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상으로 번역된 헬라어 코스모스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가 있다면 첫 째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을 포함한 만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땅과 싸울 이유는 없습니다. 또 하나는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 나오듯이 세상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싸울 이유는 더욱이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할 세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대적 마귀가 지배하고 조종하고 있는 타락한 가치 체계입니다.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죄를 짓게 만드는 모든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입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은 바로 육신의 정욕, 소유욕, 명예욕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마귀는 이런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극도로 굶주리신 상태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 받으신 시험이 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한 유혹이었습니다. 먼저 주릴 대로 주리신 예수님께 마귀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너의 능력을 마음대로 한 번 사용해 보아라고 마귀가 시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호히 거절하심으로 육신의 욕구에 굴복하도록 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다음에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이 안 다치도록 보호하실 터이니 한 번 뛰어내려보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이 사뿐히 지상에 착지하시는 순간 아마 그 광경을 목격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놀라고 환호하게 될 것이고 일약 스타로 떠오를 것입니다. 이것은 이생의 자랑, 즉 명예욕을 시험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만약 자기에게 절하고 경배하면 눈에 보이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하지요. 이것은 안목의 정욕, 즉 소유욕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실 때마다 똑같이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대적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주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유혹을 대적하시고 이기셨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사단과 세상의 공격과 유혹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단과 세상에 대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요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요 또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한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의 삶은 보이지 않는 곳에 소망을 두는 삶입니다. 사실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천국도 보이지 않습니다. 육의 세계는 보이나 영적인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 소망입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 예배를 마치고 제주에 잠시 살게 된 둘 째 딸 부부를 잠간 만나기 위해 김해 공항으로 갔습니다. 오후 5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라 시간이 충분해 여유 있게 출발했는데 가는 도중 긴급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보니 기상 악화로 인해 수속이 중단되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받아본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공항에 도착해 하염없이 전광판을 보며 기다렸습니다. 전광판에는 계속 다른 비행편도 수속 중단, 또는 결항이 되었다는 메시지가 뜨고 있었지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소망을 품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잔잔케 하실 수 있사오니 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운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저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소망과 믿음을 두고 기다리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단지 소망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불치의 병에 걸린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 반드시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낫기를 바라는 바람으로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기도도 응답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소망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도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응답하지 않으시는 편이 최선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응답되는 것도 믿음이지만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감사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비행기를 탈 수 있어도 감사하고 결국 못 타게 되어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받으며 감사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제 경우는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타게 되었습니다. 좀 늦어지긴 했지만 몇 시간 후에 비행기가 뜨게 되어 무사히 잘 갔다 왔습니다.
우리는 너무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통장에 잔고가 있어야 안심합니다. 눈에 개수가 보이고 확인이 되어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빈들에서 사역하실 때 날이 저물자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불쌍히 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대답했지요. 눈에 보이는 것, 카운트 되는 것만 신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고 결코 카운트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보이는 것에 있습니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에 있습니까? 보이는 것은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언젠가 지나가버릴 육체의 쾌락과 소유와 명예에 소망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삶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안식과 하늘에 간직하신 영원한 기업과 하나님이 주실 영광에 늘 마음과 생각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모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자란 젊은 시절에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쾌락을 즐기며 넘치는 소유와 명예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했을까요?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먼저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이해가지 않는 어리석은 결정이었습니다. 그의 위치는 왕위도 바라 볼 수 있는 서열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로열패밀리의 신분에 따른 명예를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믿음을 사는 삶의 특징은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갈채와 인기, 찬사와 명예를 아낌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지요? 하나님이 주실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비교할 수 없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아무리 큰 명예라 해도 세월이 흐르면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와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세상 명예를 분토처럼 버린 것,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명예를 버렸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을 잠시 죄악의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죄를 짓는 것도 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의 즐거움일 뿐 그 후에는 더 길고 아픈 고통이 따라옵니다. 죄악은 잠시 달콤하지만 그 쓴 맛은 지속됩니다. 믿음의 삶은 잠시 누릴 육체의 쾌락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백성과 받는 고난을 기꺼이 선택합니다. 비록 현재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앞에 있는 영원한 기쁨을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 믿음으로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다음 구절입니다.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소유로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근대에 발견되는 고대 이집트 왕가의 유물의 가치는 지금도 어마어마한데 당시 모세가 가질 수 있는 재물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선택했습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값진 재물을 다 긁어모은다 한들 천국에 있는 극히 작은 하나님의 상보다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것은 단 하나도 천국으로 가져갈 수 없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끝에 받을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애굽의 모든 보화에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의 삶을 살았던 모세의 삶은 뚜렷합니다. 그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세상에 속한 것을 아낌없이 버렸습니다. 죄의 낙, 육체의 쾌락을 버렸고 애굽의 보화, 모든 소유를 버렸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란 명예를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마치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명예를 비롯한 모든 세상의 것을 마치 배설물처럼 여겼듯이 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보이지 않는 소망을 위해 눈에 보이는 세상의 쾌락과 소유와 명예를 과감히 버리는 것입니다. 거절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대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과 수모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 주심을 마라보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마지막으로 윌리엄 보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하고 마치겠습니다.
윌리엄 보덴, 그는 1887년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큰 목장을 경영하는 대부호였습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부모가 그에게 세계 여행을 시켰는데 혼자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를 둘러보면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때 그는 마음의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이 불쌍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는 일에 내 평생을 바치리라.” 그리고는 그는 자기의 성경책 표지 안쪽에 이렇게 적어 넣었습니다. ‘No Reserve.’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는 미국의 명문인 예일대학을 졸업한 뒤 프린스턴 신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 부모님이 그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지만 그는 이슬람 선교를 위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선교를 위해 이집트로 건너갔습니다. 친지와 친구들은 “왜 하필이면 그곳에 가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고 말렸지만 그때 그는 성경 표지 안쪽에 또 한 마디의 말을 더 기록했습니다. ‘No Retreat.’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에서 사역한지 넉 달도 채 되지 않아서 그만 뇌막염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발병한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자기의 성경표지 안쪽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 남겼습니다. ‘No Regret.’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No Reserve, No Retreat, No Regret.’ ‘주님을 위해 이 땅에 결코 남겨두지 않고 절대 물러서지 않고 후퇴하지 않으리’ 믿음의 삶을 이처럼 짧고 분명하게 잘 표현한 문구도 드물 것입니다. 원하기만 했다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던 세상의 쾌락과 소유욕, 명예욕을 과감하게 버리고 짧은 생애를 살았던 그는 이집트 카이로에 묻혔습니다. 그의 먼지 덮인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윌리엄 보덴(1887~1913),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떠나서는 그의 삶을 설명할 길이 없다.’
비록 26세라는 짧은 일기로 꿈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값진 생애였습니다. 왜냐구요?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자였습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모세와 같이, 바울과 같이 윌리엄 보덴과 같이, 수도 없이 먼저 간 믿음의 선배들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고 세상이 주는 육신의 정욕과 소유욕과 명예욕을 거절하고 포기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수모를 선택하여 남은 생애를 사신다면 반드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자가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세상과 친구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이긴 자로써 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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