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양은 나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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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8-28 15:33 조회1,82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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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0: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10: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앞부분인 10장 전반부에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인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나는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나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한 삶을 주기 위해서 왔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 사이에는 또 다시 분쟁이 일어납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제정신이 아니라 미쳤다고 비난했고 어떤 유대인들은 ‘아니다, 미친 자가 어떻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반박했지요. 하여튼 예수님이 누구냐를 둘러싼 논쟁가운데 긴장감이 서서히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 말씀이 이어집니다. 22절을 다시 봅니다.
10: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장소는 예루살렘이고 때는 겨울인데 조금 생소한 절기가 소개됩니다. 바로 수전절이라는 절기입니다. 원래 구약 성경에 나오는 3대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이고 그 외에도 나팔절과 욤 키푸르라고 불리는 대속죄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전절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전절은 구약성경의 기록이 이미 끝난 이후인 신약과 구약 중간 시대에 생긴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수전절은 과연 어떤 절기일까요? 잠간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유다 왕국은 이어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또다시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헬라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그가 세웠던 광대한 헬라대제국은 수하에 있던 네 명의 장군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는데 유대 땅은 그 중 프톨레미 장군이 세운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프톨에미 왕조가 유대 지방을 다스렸던 약 120년간은 대체로 평화와 안정을 누렸지요. 하지만 주전 198년 프톨레미 왕국이 북쪽 시리아 지방에 있던 셀류쿠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셀류쿠스 왕국이 유대를 지배하게 되는데 이후 사정이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셀류쿠스 왕조는 강력한 헬라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유대 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이 박해는 안티오쿠스 4세 때에 극에 달하게 됩니다. 특별히 안티오쿠스 4세는 성전에 제사 드리는 것을 금지했고 또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으며 할례와 안식일 규례까지 금지했습니다. 만약 할례를 했다가 들키면 아기도 엄마도 죽였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지극히 혐오하는 돼지 피를 성전 제단에 바치도록 하였는데 이런 성전 모독은 경건한 유대인들을 결정적으로 자극해 독립투쟁의 불을 붙였습니다. 특히 모딘이라는 곳에 살던 제사장 맛다디아가 다섯 아들과 함께 이방 제단을 부수고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 중 셋 째 아들의 이름이 유다 마카비였는데 마카비는 망치라는 뜻으로 그는 가장 유능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따서 이 전쟁을 마카비 전쟁이라고 하지요. 그들은 3년의 끈질긴 게릴라 전쟁 끝에 마침내 성전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정화한 후 8일간 성대한 봉헌축제를 열었는데 유대인들은 이 날을 ‘하누카’라고 불렀습니다. 하누카는 ‘깨끗하게 해서 다시 봉헌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하누카가 바로 수전절인 것이지요.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당시 성전에 있던 금 촛대 메노라에는 겨우 하루 정도 쓸 기름만 있었는데 기적이 일어나 8일 동안 불을 밝혔다고 전합니다. 이 절기에는 유대인 각 가정마다 등불을 켜서 기념했으므로 ‘빛의 명절’이라고도 불리며 8일간 계속됩니다. 수전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에서 지켜지고 있는 절기입니다. 수전절은 우리의 성탄절과 시기가 비슷해서 유대인들의 성탄절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이 절기에는 8일 동안 불을 밝히고 우리가 설날 가정에서 윷놀이를 하듯이 그들은 ‘드레이들’이란 사각형 팽이를 가지고 전통 놀이를 합니다. 하지만 빛의 절기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유대인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당신들이 또 다시 그런 박해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자 그 유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네요. “그러면 우리들의 달력에는 축제일이 하나 더 생길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가 유대인을 핍박한 후 유월절이 생겼고 페르시아 제국 때 하만이라는 자가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려다가 실패한 후 부림절이 생겼으며 그리고 안티오쿠스가 이스라엘을 박해하다가 결국 수전절이 생기게 되었으니 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수전절이 이르렀다는 말은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유월절까지 불과 4개월이 남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즉, 앞으로 넉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무렵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라는 용어는 군사지도자나 정치지도자로 이해되었고 로마 속박에서 해방시켜줄 혁명지도자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이 정말 메시아면 확실하게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이미 너희에게 말했지만 너희가 믿지 않는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이미 수없이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이야기하신 것, 그리고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것만 해도 이미 메시아임을 밝히 증거하신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일,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쳐 주신 일, 38년 동안 꼼짝 못하고 있던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일, 떡 다섯과 물고기 둘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쳐 주신 일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라는 증거를 차고 넘치도록 증거해 줍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믿지 않으려고 이미 마음을 닫은 자들은 아무리 예수님이 진리를 말씀하셔도, 그리고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셔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나는 내 양을 안다. 내 양은 나를 따른다.’고 말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넓은 들판에 많은 양들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평선에 걸리기 시작하고 양들은 이제 우리에 들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목자는 자신의 특유한 목소리로 양들을 부릅니다. 양들을 귀를 쫑긋 세우더니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에게 몰려듭니다. 그리고 목자를 줄줄 따라가지요. 목자는 양들을 안전한 우리 안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그 양 중의 한 양이라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양은 목자를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만일 목자가 부르는 음성을 듣고도 자기 멋대로 가는 양이 있다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은 한 마디로 신뢰입니다. 진짜 신뢰하면 따르게 되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긴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만약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도 목자를 따르지 않는다면 남의 양이든지 아니면 귀 먹은 양이거나 고집불통의 양이겠지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는 목자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사실 이 주제는 중요하면서도 조심스런 주제입니다.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또 이것을 잘못 이용해서 많은 이단 사이비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내게 직접 말씀했다는 직통계시를 주장하면서 절대 복종을 요구하거나 돈을 갈취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통일교 교주 문선명을 비롯해 지난 1992년 한국 교회를 강타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도 죄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기도하다가 마음에 조용히 내적인 확신이 생길 수 있고 성경을 읽다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강한 영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드물게 귀에 들리는 음성은 아니지만 내면에서 지각할 수 있는 음성이 인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경험을 지나치게 절대화하고 미화하거나 하나님이 내게 직접 말씀해 주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뭔가 특별하거나 대단히 신령한 사람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는 제자들이 날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시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요 14: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은 비록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 떠오르는 말씀, 혹은 말씀을 읽거나 묵상하는 중에 오는 깨달음이나 감동이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른 후 영적으로 분별력을 잃었을 때 선지자 나단이 찾아와서 말씀을 전했고 다윗은 그 말씀으로 인해 비로소 깨어져 회개했습니다. 특별히 내 주위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분들을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일상생활을 같이 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말씀의 충고나 권면에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다른 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환경으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실패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길을 막으심으로도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술사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모압왕 발락의 간청으로 길을 떠났을 때 나귀가 엉뚱하게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지요. 화가 난 발람이 채찍으로 때리자 나귀는 다시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몸을 담벼락에 대고 발람의 발을 짓눌러버렸습니다. 화가 난 발람은 다시 갖고 있던 채찍으로 사정없이 나귀를 때리다가 천사가 칼을 들고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막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은 아시아 전도를 계획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시고 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정황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마 길을 떠나려고 할 때마다 계속 무슨 문제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실 때 종종 마음의 짐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짐은 걱정 근심과 성격이 좀 다릅니다. 걱정근심은 불안으로 이끌지만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짐은 순종으로 이끌어 갑니다.
지난주에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제게 한 가지 개인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사정을 받아주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고 제가 할 일만 늘어날 것 같아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그 일이 마음의 짐으로 다가오면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겐 작은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그에겐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차차 들기 시작했지요. 그렇다면 그를 돕는 일이 주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연락을 해서 제가 하겠다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너무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사실 그날 자기와 사모님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성령님께서 제 마음에 짐을 주셔서 결정하도록 하신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평상시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연습 시간을 가지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좋은 시간을 떼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시간이란 방해받지 않는 시간, 다른 소음들을 모두 다 off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에 둔감한 이유는 주위에 너무나 많은 소음으로 방해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첫 시간이 가장 좋습니다. 아니면 밤도 좋긴 하지만 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마친 뒤라 갖가지 잡념이 떠오르기가 쉽고 또 몸이 피곤해 집중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가끔 제가 단톡방에 QT 묵상한 내용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이른 아침에 가지는 QT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마음에 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말씀을 주의 깊게 읽고 묵상할 때에 깨달음이 온다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봐도 무난할 것입니다. 이 과정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깨달음이 올 때까지 주님 앞에 기도하며 머무를 수 있는 인내입니다.
때로는 떠오르는 생각이 성령님이 주신 것인가, 아니면 순전히 내 생각인가? 구분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경과 일치되는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생각은 성경과 반드시 100%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말씀을 보면서도 누구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나 미움이 계속 떠오른다면 그것은 성령의 생각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쉬운 길이 아니라 종종 어렵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즉 믿음이 필요한 일이지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쉽지 않은 결단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익숙한 환경, 안정된 생활을 떠나 75세의 고령으로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믿음의 행동을 하도록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는 것은 힘들고 고단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7절을 다시 봅니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나는 그들을 알며’라는 문장에 주의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애굽으로 이주한 후 야곱의 말년에 요셉이 두 아들과 함께 문병을 왔습니다. 이 때 야곱은 두 손자에게 축복하게 되는데 축복할 때 보통 오른손은 큰아들에게 왼손은 둘째에게 얹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엇바꾸어 손을 얹고 축복하지요. 이 때 요셉은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 착각한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가 손을 바꾸도록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때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 48: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야곱은 나도 안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선견지명으로 손자들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요. 둘째 아들이었던 에브라임이 더 큰 민족이 될 것을 말입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내가 둘째에게 오른 손을 얹은 것을 안다. 하지만 이유가 있단다.’ 그런 뜻이었지요. 때로는 우리가 볼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잘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난 네게 그 길이 최선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단다.’
주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 자신의 필요, 장점과 약점,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머리털 수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를 알고 계시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과 관심이 없으시다면 속속들이 알고 계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오히려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다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 말씀입니다.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안전장치를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지요. 다시 보시면 이 말씀에서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 하나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완벽한 사랑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한 아이가 길을 가고 있는데 양쪽에 아빠 엄마가 손을 잡고 있습니다. 아마 이 아이에게 갑자기 위험이 닥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아빠엄마는 어떻게 할까요? 아마 양쪽에서 손을 꼭 놓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자십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이 우리의 손을 꼭 붙잡고 놓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있다기보다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것입니다. 이보다 안전할 수 있을까요?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압니다, 그리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우리도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갑니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려도 때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도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말씀을 통해 이야기하시는 주님만을 신뢰하며 따릅니다. 저와 여러분은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내 생각을 따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따르고 있습니까? 세상의 풍조를 따릅니까? 내 욕심을 따릅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양으로써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경성대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0: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앞부분인 10장 전반부에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인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나는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나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한 삶을 주기 위해서 왔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 사이에는 또 다시 분쟁이 일어납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제정신이 아니라 미쳤다고 비난했고 어떤 유대인들은 ‘아니다, 미친 자가 어떻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반박했지요. 하여튼 예수님이 누구냐를 둘러싼 논쟁가운데 긴장감이 서서히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 말씀이 이어집니다. 22절을 다시 봅니다.
10: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장소는 예루살렘이고 때는 겨울인데 조금 생소한 절기가 소개됩니다. 바로 수전절이라는 절기입니다. 원래 구약 성경에 나오는 3대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이고 그 외에도 나팔절과 욤 키푸르라고 불리는 대속죄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전절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전절은 구약성경의 기록이 이미 끝난 이후인 신약과 구약 중간 시대에 생긴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수전절은 과연 어떤 절기일까요? 잠간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유다 왕국은 이어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또다시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헬라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그가 세웠던 광대한 헬라대제국은 수하에 있던 네 명의 장군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는데 유대 땅은 그 중 프톨레미 장군이 세운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프톨에미 왕조가 유대 지방을 다스렸던 약 120년간은 대체로 평화와 안정을 누렸지요. 하지만 주전 198년 프톨레미 왕국이 북쪽 시리아 지방에 있던 셀류쿠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셀류쿠스 왕국이 유대를 지배하게 되는데 이후 사정이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셀류쿠스 왕조는 강력한 헬라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유대 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이 박해는 안티오쿠스 4세 때에 극에 달하게 됩니다. 특별히 안티오쿠스 4세는 성전에 제사 드리는 것을 금지했고 또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으며 할례와 안식일 규례까지 금지했습니다. 만약 할례를 했다가 들키면 아기도 엄마도 죽였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지극히 혐오하는 돼지 피를 성전 제단에 바치도록 하였는데 이런 성전 모독은 경건한 유대인들을 결정적으로 자극해 독립투쟁의 불을 붙였습니다. 특히 모딘이라는 곳에 살던 제사장 맛다디아가 다섯 아들과 함께 이방 제단을 부수고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 중 셋 째 아들의 이름이 유다 마카비였는데 마카비는 망치라는 뜻으로 그는 가장 유능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따서 이 전쟁을 마카비 전쟁이라고 하지요. 그들은 3년의 끈질긴 게릴라 전쟁 끝에 마침내 성전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정화한 후 8일간 성대한 봉헌축제를 열었는데 유대인들은 이 날을 ‘하누카’라고 불렀습니다. 하누카는 ‘깨끗하게 해서 다시 봉헌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하누카가 바로 수전절인 것이지요.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당시 성전에 있던 금 촛대 메노라에는 겨우 하루 정도 쓸 기름만 있었는데 기적이 일어나 8일 동안 불을 밝혔다고 전합니다. 이 절기에는 유대인 각 가정마다 등불을 켜서 기념했으므로 ‘빛의 명절’이라고도 불리며 8일간 계속됩니다. 수전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에서 지켜지고 있는 절기입니다. 수전절은 우리의 성탄절과 시기가 비슷해서 유대인들의 성탄절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이 절기에는 8일 동안 불을 밝히고 우리가 설날 가정에서 윷놀이를 하듯이 그들은 ‘드레이들’이란 사각형 팽이를 가지고 전통 놀이를 합니다. 하지만 빛의 절기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유대인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당신들이 또 다시 그런 박해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자 그 유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네요. “그러면 우리들의 달력에는 축제일이 하나 더 생길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가 유대인을 핍박한 후 유월절이 생겼고 페르시아 제국 때 하만이라는 자가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려다가 실패한 후 부림절이 생겼으며 그리고 안티오쿠스가 이스라엘을 박해하다가 결국 수전절이 생기게 되었으니 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수전절이 이르렀다는 말은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유월절까지 불과 4개월이 남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즉, 앞으로 넉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무렵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라는 용어는 군사지도자나 정치지도자로 이해되었고 로마 속박에서 해방시켜줄 혁명지도자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이 정말 메시아면 확실하게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이미 너희에게 말했지만 너희가 믿지 않는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이미 수없이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이야기하신 것, 그리고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것만 해도 이미 메시아임을 밝히 증거하신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일,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쳐 주신 일, 38년 동안 꼼짝 못하고 있던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일, 떡 다섯과 물고기 둘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쳐 주신 일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라는 증거를 차고 넘치도록 증거해 줍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믿지 않으려고 이미 마음을 닫은 자들은 아무리 예수님이 진리를 말씀하셔도, 그리고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셔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나는 내 양을 안다. 내 양은 나를 따른다.’고 말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넓은 들판에 많은 양들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평선에 걸리기 시작하고 양들은 이제 우리에 들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목자는 자신의 특유한 목소리로 양들을 부릅니다. 양들을 귀를 쫑긋 세우더니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에게 몰려듭니다. 그리고 목자를 줄줄 따라가지요. 목자는 양들을 안전한 우리 안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그 양 중의 한 양이라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양은 목자를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만일 목자가 부르는 음성을 듣고도 자기 멋대로 가는 양이 있다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은 한 마디로 신뢰입니다. 진짜 신뢰하면 따르게 되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긴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만약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도 목자를 따르지 않는다면 남의 양이든지 아니면 귀 먹은 양이거나 고집불통의 양이겠지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는 목자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사실 이 주제는 중요하면서도 조심스런 주제입니다.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또 이것을 잘못 이용해서 많은 이단 사이비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내게 직접 말씀했다는 직통계시를 주장하면서 절대 복종을 요구하거나 돈을 갈취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통일교 교주 문선명을 비롯해 지난 1992년 한국 교회를 강타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도 죄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기도하다가 마음에 조용히 내적인 확신이 생길 수 있고 성경을 읽다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강한 영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드물게 귀에 들리는 음성은 아니지만 내면에서 지각할 수 있는 음성이 인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경험을 지나치게 절대화하고 미화하거나 하나님이 내게 직접 말씀해 주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뭔가 특별하거나 대단히 신령한 사람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는 제자들이 날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시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요 14: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은 비록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 떠오르는 말씀, 혹은 말씀을 읽거나 묵상하는 중에 오는 깨달음이나 감동이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른 후 영적으로 분별력을 잃었을 때 선지자 나단이 찾아와서 말씀을 전했고 다윗은 그 말씀으로 인해 비로소 깨어져 회개했습니다. 특별히 내 주위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분들을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일상생활을 같이 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말씀의 충고나 권면에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다른 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환경으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실패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길을 막으심으로도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술사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모압왕 발락의 간청으로 길을 떠났을 때 나귀가 엉뚱하게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지요. 화가 난 발람이 채찍으로 때리자 나귀는 다시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몸을 담벼락에 대고 발람의 발을 짓눌러버렸습니다. 화가 난 발람은 다시 갖고 있던 채찍으로 사정없이 나귀를 때리다가 천사가 칼을 들고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막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은 아시아 전도를 계획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시고 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정황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마 길을 떠나려고 할 때마다 계속 무슨 문제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실 때 종종 마음의 짐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짐은 걱정 근심과 성격이 좀 다릅니다. 걱정근심은 불안으로 이끌지만 주님이 주시는 마음의 짐은 순종으로 이끌어 갑니다.
지난주에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제게 한 가지 개인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사정을 받아주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고 제가 할 일만 늘어날 것 같아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그 일이 마음의 짐으로 다가오면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겐 작은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그에겐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차차 들기 시작했지요. 그렇다면 그를 돕는 일이 주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연락을 해서 제가 하겠다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너무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사실 그날 자기와 사모님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성령님께서 제 마음에 짐을 주셔서 결정하도록 하신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평상시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연습 시간을 가지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좋은 시간을 떼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시간이란 방해받지 않는 시간, 다른 소음들을 모두 다 off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에 둔감한 이유는 주위에 너무나 많은 소음으로 방해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첫 시간이 가장 좋습니다. 아니면 밤도 좋긴 하지만 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마친 뒤라 갖가지 잡념이 떠오르기가 쉽고 또 몸이 피곤해 집중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가끔 제가 단톡방에 QT 묵상한 내용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이른 아침에 가지는 QT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마음에 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말씀을 주의 깊게 읽고 묵상할 때에 깨달음이 온다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봐도 무난할 것입니다. 이 과정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깨달음이 올 때까지 주님 앞에 기도하며 머무를 수 있는 인내입니다.
때로는 떠오르는 생각이 성령님이 주신 것인가, 아니면 순전히 내 생각인가? 구분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경과 일치되는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생각은 성경과 반드시 100%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말씀을 보면서도 누구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나 미움이 계속 떠오른다면 그것은 성령의 생각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쉬운 길이 아니라 종종 어렵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즉 믿음이 필요한 일이지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쉽지 않은 결단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익숙한 환경, 안정된 생활을 떠나 75세의 고령으로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믿음의 행동을 하도록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는 것은 힘들고 고단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7절을 다시 봅니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나는 그들을 알며’라는 문장에 주의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애굽으로 이주한 후 야곱의 말년에 요셉이 두 아들과 함께 문병을 왔습니다. 이 때 야곱은 두 손자에게 축복하게 되는데 축복할 때 보통 오른손은 큰아들에게 왼손은 둘째에게 얹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엇바꾸어 손을 얹고 축복하지요. 이 때 요셉은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 착각한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가 손을 바꾸도록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때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 48: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야곱은 나도 안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선견지명으로 손자들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요. 둘째 아들이었던 에브라임이 더 큰 민족이 될 것을 말입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내가 둘째에게 오른 손을 얹은 것을 안다. 하지만 이유가 있단다.’ 그런 뜻이었지요. 때로는 우리가 볼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잘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난 네게 그 길이 최선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단다.’
주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 자신의 필요, 장점과 약점,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머리털 수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를 알고 계시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과 관심이 없으시다면 속속들이 알고 계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오히려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다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 말씀입니다.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안전장치를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지요. 다시 보시면 이 말씀에서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 하나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완벽한 사랑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한 아이가 길을 가고 있는데 양쪽에 아빠 엄마가 손을 잡고 있습니다. 아마 이 아이에게 갑자기 위험이 닥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아빠엄마는 어떻게 할까요? 아마 양쪽에서 손을 꼭 놓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자십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이 우리의 손을 꼭 붙잡고 놓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있다기보다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것입니다. 이보다 안전할 수 있을까요?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압니다, 그리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우리도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갑니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려도 때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도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말씀을 통해 이야기하시는 주님만을 신뢰하며 따릅니다. 저와 여러분은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내 생각을 따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따르고 있습니까? 세상의 풍조를 따릅니까? 내 욕심을 따릅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양으로써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경성대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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