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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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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2-08-20 12:37 조회1,04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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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0: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0: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마음을 알게 도와주옵소서. 그리고 우리 자신도 주님과 같은 삶을 따르도록 도와주옵소서.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중의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목자와 양 이야기지요. 성경에서 목자와 양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이야기일 겁니다. 몇 년 전에 러시아로 해외봉사를 간 적이 있습니다. 일정 중 어느 날 저녁에 바로 잡은 양고기를 먹을 시간이 있었습니다. 같이 갔던 목사님 한 분과 제가 자원해서 주문한 양고기를 받으러 같이 갔는데 저희는 잘 다듬어진 상태로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희에게 건네준 것은 통째로 가죽만 벗겨진 양 두 마리였습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각각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같이 갔던 목사님이 시골 출신이라 어릴 때부터 돼지 잡는 것을 보기도 하고 직접 잡아 보기도 하셨다더군요. 그래서 칼을 가져와서 능숙하게 각 부위별로 자르기 시작했는데 저도 한 번 따라하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그저 옆에서 보조 역할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요. 사실 그 때만큼 양이란 존재가 제 가까이 다가온 적은 없었습니다. 비록 죽은 양이었지만요. 우리는 양에 대해서 이야기는 많이 듣지만 사실 양에 대해 잘 모릅니다.
 
양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시력이 나쁩니다. 양은 방향감각도 잘 없습니다. 그래서 앞에 낭떠러지가 있어도 앞으로 직진하기가 쉽습니다. 양의 다리는 생각보다 약해서 뚱뚱하거나 임신한 양의 경우 한 번 넘어지면 목자가 일으켜 줄 때까지 잘  못일어납니다. 만일 푹 파인 구석진 곳에서 넘어졌는데도 목자가 미처 보지 못하고 놓치면 혼자 버둥대다가 질식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양은 멋대로 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각자 자기 먹이 찾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제멋대로 갑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 말씀에 우리는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씀합니다. 양은 자신을 공격할 능력도 없고 방어할 만한 능력도 없어서 반드시 목자가지켜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양은 죽을 때가 되면 온순해집니다. 염소나 돼지 같은 동물들은 죽음 직전에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반면 양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온순해 진다고 합니다.
 
목자로써 양을 8년간 키운 경험을 바탕으로 ‘양과 목자’라는 책을 쓴 필립 켈러는 양이 착한 것 같은데 무척 고집이 세고 보수적인 습관을 가진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보수적이라는 말은 꼭 가던 길을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컨트롤하지 않으면 한 길만 오가기 때문에 넓은 풀밭이 마치 오선지처럼 줄이 생기면서 깊고 길게 파인답니다. 그리고 가만 놔두면 한 곳에서 풀만 아니라 풀뿌리까지 뜯어먹어버리는 바람에 풀밭을 황폐하게 만들고 맙니다. 결국 목자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가 바로 양인 것입니다.
 
자,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절도, 강도 그리고 목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절도 혹은 도둑은 문이 아니라 담을 넘어가거나 창문으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강도는 종종 담을 부수거나 헐고 들어가기도 하지요. 하지만 양의 목자는 오직 문을 통해 나오고 들어갑니다. 절도나 강도는 침입자요 사기꾼입니다. 요10장 3절을 봅니다.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0: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 당시에 양 우리는 두 종류가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는 큰 마을에 있는 공동 우리였고 다른 하나는 산간벽지에 있는 개인 우리였습니다. 방금 읽은 3-5절까지는 큰 마을에 있던 공동 우리를 배경으로 하고 7절부터 나오는 양 우리는 산간벽촌의 개인 우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먼저 공동 우리는 보통 마을에서 공동으로 관리했는데 고용된 문지기가 있어서 목자가 오면 양을 내어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중동지역에 공동으로 운영하는 곳이 있습니다. 한 번은 정말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지 궁금했던 사람이 팔레스타인에 가서 공동 양 우리를 지켜보았답니다. 그날 저녁 세 명의 목자가 각자의 양들을 끌고 와서 양 우리에 양들을 넣었습니다. 물론 양들이 다 섞였겠지요. 과연 목자들이 어떻게 자기 양들을 찾아낼까 궁금했던 차에 다음날 아침 양들이 우리에서 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정말 놀라왔답니다. 한 목자가 와서 부르는 소리를 내니까 그 목자의 양들만 쏙 빠져나오더라는 것이지요. 또 그 다음 목자가 와서 부르니 또 자기 양들만 쏙 빠져나오고 마지막 목자도 그런 식으로 자기의 양들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한 마디로 amazing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양은 어떻게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영상으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영상)
 
그렇습니다.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며 오히려 도망가게 됩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은 곧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양은 목자 되신 주님의 양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양 우리에서 양을 다 내어놓고 나면 목자가 앞서 간다는 것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서양 목자와 근동의 목자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서양에는 보통 총을 든 목자가 말을 타고 있고 가축 주위에 개들이 있는 장면을 상상하게 합니다. 즉 훈련된 개들을 통해 가축 떼를 몰고 목자는 뒤에서 따라갑니다. 하지만 중동의 목자들은 앞서 갑니다. 앞서 가면 양들이 쫄쫄 따라오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정한 목자상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목자는 양떼 앞서 가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본을 보이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벧전 5: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주장한다는 말씀은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목자는 권력으로나 힘으로 양 떼를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겸손으로 본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참 목자는 전쟁터 제일 뒤에서 ‘돌격 앞으로!’ 외치는 지휘관이 아니라 총을 맞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제일 먼저 뛰어가는 지휘관입니다. 위험이 다가올 때 제일 먼저 위험에 직면하는 사람이 참 목자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신 참 목자이셨습니다. 비록 양 떼들인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흩어졌지만 주님은 그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앞서 걸어가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양은 목자의 자취를 따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목자이신 예수님의 자취, 즉 고난의 발자국을 뒤따라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 비유를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말씀하십니다.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제 예수님은 큰 마을에 있는 양 우리가 아닌 산간벽지의 개인 우리를 배경으로 이야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먼저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의 목자라고 하시더니 갑자기 또 내가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뭘까요? 배낭여행을 하던 한 젊은이가 중동지방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무리의 양을 치고 있는 목자를 만났는데 밤이 되자 목자는 젊은이에게 양 우리를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 우리는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오직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이 하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젊은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양 우리에 들어가는 통로만 있을 뿐 문이 없습니까?” 그러자 그 목자가 대답했답니다. “예, 제가 바로 그 통로의 문입니다. 양들이 있는 우리 안에는 불빛이 없지요. 그래서 열려진 통로만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 통로에 눕습니다. 내 몸을 넘어가지 않으면 한 마리의 양도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내 몸을 넘어가지 않으면 어떤 이리나 늑대라도 우리 안으로 기어들어갈 수가 없답니다.”
 
한 마디로 목자가 양의 문이었던 셈이지요.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영원히 안전한 우리 같은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생명을 얻고 풍성한 꼴을 얻을 수 있으며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안전함과 휴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영원한 목장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요 통로입니다.
 
지금까지 오늘 본문 앞 구절까지 말씀을 나누었고 이제 오늘 본문까지 왔습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0: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0: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기서 삯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삯군은 일당을 받고 양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삯군과 목자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목자는 늘 양 중심입니다. 삯군은 늘 삯 중심입니다. 목자는 양을 위해 일하고 삯군은 대가를 바라고 일합니다. 직장인들 가운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받는 만큼만 일할거야.’ 요사이 많은 젊은 세대 직장인들은 퇴근 시간을 철저히 지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끝내야 하는 중요한 업무가 남아있어도 시간이 되면 그냥 두고 나갑니다. 보수를 더 주는 곳이 있으면 쉽게 자리를 옮깁니다. 회사를 자기 이익을 위해 최대한 이용하려고 합니다. 주인의식이 없습니다. 월급 때문에 일하는 것은 삯군의 모습입니다. 회사에 있을 동안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삯군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양이 위험에 처할 때입니다. 삯군은 양의 안전보다 자신의 안전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위험하거나 손해 볼 것 같으면 은근히 내빼고 맙니다. 구약 성경에서 참 목자의 모습을 보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원래 양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그가 쓴 대표적인 시편 23편은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편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한절 속에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먹을 풀, 마실 물, 싸울 수 있는 힘, 이런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살필 목자입니다. 목자가 있으면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됩니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 하나님이 진정 목자이심을 철저히 깨닫고 체험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닮아가고자 했습니다. 그가 거인 골리앗과의 싸움을 앞두고 있었을 때 덩치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도무지 상대가 안 된다고 걱정하던 사울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17: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17: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양 새끼를 구하기 위해 사자나 곰과 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삯군 목자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한 마디로 목숨을 걸고 양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가 이런 목자의 마음으로 양떼들을 돌보았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란 큰 양 떼를 그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시편 78편 말씀을 새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시 78:70 주님의 종 다윗을 선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일하는 그를 뽑으셨다.
78:71 암양을 돌보는 그를 데려다가, 주님의 백성 야곱과 주님의 유산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게 하셨다.
78:72 그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들을 기르고, 슬기로운 손길로 그들을 인도하였다.
 
다윗은 어릴 때 양 떼를 돌보던 목자의 심정으로 한결같이 그리고 지혜롭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던 것입니다. 삯군은 양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지만 목자는 양들이 자신의 삶의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목자의 마음은 한 마디로 양들에 대한 비이기적 사랑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런 목자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다시 한 번 봅니다.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압니다. 이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저와 아내는 요즈음 같으면 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과정으로 결혼했습니다. 당시 선교단체에 있을 때 저희를 인도하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저와 아내는 서로를 전혀 몰랐지만 저희를 지도하시던 목사님 부부의 의견을 존중해서 믿음으로 결혼했습니다. 저도 아내를 모르고 아내도 저를 몰랐지만 두 사람 모두를 가장 아시는 분이 그 목사님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 목사님을 주님 안에서 존경하고 신뢰했기에 저희가 받아들이고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 함께 살다보니 경험적으로 서로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한 번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겪어봐야 진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위에 누군가 가족 가운데 뜻밖의 슬픔을 당했을 때 어떻게 위로할지 고민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똑같은 어려움을 먼저 겪어 본 사람입니다. 겪어 본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겪어보지 않고는 안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바로 우리 인생의 고통을 몸소 겪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가장 두렵고 고통스런 과정, 바로 죽음까지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십니다. 경험적으로 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이 말씀을 영어로 보면 ‘I am the shepherd’인데 여기에는 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호’라는 전치사로 하나 밖에 없는 바로 그 목자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이 많아 보이지만 사실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바로 선한 목자입니다. 이전에 가끔 나눈 이야기인데 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라 한 번 더 나눌까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개척한 후배 전도사님으로부터 자기 교회 주일 밤 예배에 설교를 좀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날 설교할 제목을 미리 불러주었습니다.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하고 말했습니다. 전도사님은 그 뒤 부분에 또 있는가 싶어서 “그 다음에는요?”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선배 목사님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라고 반문했답니다. 전도사님은 그 대답을 듣고 잠시 주춤거리더니 ‘알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약속된 날 목사님은 그 예배에 참석해서 건네주는 주보를 받아들고 강단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 주보를 펼쳐 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설교 제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던 겁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그만 기가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냥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제목으로 충분하다는 뜻으로 ‘그거면 됐지 뭐가 필요해?’라고 말했는데 그 말까지 토씨 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제목으로 올렸던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이왕이면 제목대로 하자고 마음먹고 준비해 온 원고를 덮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말씀을 나누기 시작했는데 나누면서 정말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는 말씀이 전혀 새롭고 실감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에게는 선한 목자만 있으면 됩니다. 그것 말고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믿고 살아가길 원하신다면 매일 2가지 고백이 필수적입니다. 먼저는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나의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는 목자라고 진정 믿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므로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 다윗처럼 말입니다.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뭔가 자기들에게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금지된 선악과를 먹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라고 하는 사단의 거짓말에 말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어떤 사람들에겐 사치입니다. 제 3세계에 사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리 덜덜거리는 중고차라도 그들에겐 그림의 떡입니다. 오래된 신발도 맨발로 다니는 그들에겐 풍요입니다. 현대 사회는 자족을 모르는 사회입니다. 범람하는 광고 때문에 과잉인데도 늘 부족하다 느끼게 만드는 사회입니다. 너무 많이 먹어 비만이 된 후 또 살 뺀다고 약을 먹는 시대입니다. 우리 경성대학교회 성도들은 모두 목자 되신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감사합니다. 충분합니다.’를 고백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언젠가 우리를 생명의 샘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영생이란 우리가 그냥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질병 가운데 영원히 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생이란 죄와 질병 고통 슬픔 죽음이 없는 곳에서 무엇보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늘 ‘감사합니다. 충분합니다.’를 입술로 고백하면서 선한 목자 되신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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