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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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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19-11-20 16:22 조회5,7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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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1532년 잉글랜드 왕 헨리 8세는 앤 볼린(1,000일 남짓 왕비로 있었다고 해서 천일의 앤으로 불리지요)과 결혼하기 위해 첫 왕비인 캐더린과 이혼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에서 승인하지 않자 교황청과 결별하고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됩니다. 하지만 그 후 영국 국교회는 교황만 없을 따름이지 가톨릭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영국 기독교는 크게 두 종파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냥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한 정도로 만족하자는 국교회와 ‘이 정도로 안 된다, 제도를 완전히 정화, 즉 purify해서 개혁해야 한다.’는 청교도, 즉 puritans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청교도들 가운데는 제도권 안에 남아 있으면서 개혁을 하자는 부류가 있었던 반면에 국교회 자체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완전 분립해야 한다는 분리파(separatists)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들 분리파들은 '필그림' 즉 순례자로 불리었지요. 하지만 영국 왕정은 이들이 국교회에서 이탈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여왕 엘리자베스1세는 종교 분파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지만 뒤를 이은 제임스1세와 찰스1세는 분리파에 대해 심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결국 분리파는 비교적 신앙에 자유로웠던 네덜란드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낯선 문화, 어려운 경제 사정, 자녀들의 신앙 정체성 위기 등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신대륙으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꼭 400년 전인 1620년 9월16일, 그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향하게 됩니다.

배에 오른 사람들은 선원을 제외하고 총 102명이었는데 이 중 44명이 분리파였고 나머지는 다른 이유로 합승한 승객들이었습니다. 장장 5,400km가 넘는 항해는 순탄하지 않았지만 결국 두 달이 지난 1620년 11월21일 신대륙 아메리카에 도착했습니다.

이 과정에 한 명이 죽고 한 아기가 태어나는 바람에 인원은 결국 동수가 되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이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떤 감사를 드렸을까요? 이런 감사 제목들이었습니다.

1. 우리들 모두가 타기에는 아주 작은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였지만 그 배라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2. 시속 3km밖에 안 되는 정말 늦은 속도로 항해했지만 후퇴하지 않고 계속 전진하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3. 힘들고 어려운 항해로 인해 한 명이 세상을 떠났지만 새로 한 아이가 태어난 것에 감사드립니다.
4. 엄청난 폭풍으로 인해 큰 돛까지 부러지고 말았지만 배까지 파선되지 않아서 감사드립니다.
5. 항해 중, 여자들 몇 명이 파도 속에 휩쓸렸지만 아무도 생명을 잃지 않고, 모두 구출됨을 감사드립니다.
6. 인디언들의 방해로 인해 상륙할 장소를 찾지 못해 한 달 동안이나 표류했지만 결국 호의적인 원주민들이 사는 곳에 상륙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7. 고통스럽고 힘든 3개월 반의 긴 항해였지만 단 한 사람도 되돌아가자는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플리머스에 정착한 그 해 겨울, 신대륙 아메리카는 몹시도 추웠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질병, 그리고 굶주림으로 거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항해 중 배에서 태어난 아기도 그 해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고 그 차갑던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이 찾아왔을 때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토지를 개간하여 옥수수, 원두, 밀, 보리 등을 심었습니다. 드디어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자 신대륙에서 감격의 첫 수확을 하게 되었지요. 너무나 기뻤던 그들은 추수한 곡식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예배를 드렸으며 도움을 준 원주민들을 청하여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추수 감사예배는 매년 이어져서 마침내 1789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온 미국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도록 정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드리는 추수감사예배의 역사적 유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14년부터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추수감사절이 시작됐지요.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아 그동안 잊었던 감사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는 환경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환경을 바라보는 생각과 관점을 바꿀 수 있습니다. 관점이 바뀌면 똑 같은 상황이라도 해석이 달라집니다. 컵에 물이 반쯤 차 있는 것을 보고 불평하는 사람은 ‘물이 반 밖에 없네.’라고 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물이 반이나 있네.’라고 말합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내게 없는 것을 보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내게 있는 것을 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가능한 일도 불가능으로 끌어내리지만 감사는 오히려 불가능에서 가능성을 끌어올립니다. 불평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지만 감사는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시편 50편은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배는 형식이 있고 또 형식이 중요합니다. 경건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분위기, 영감 있는 찬양과 기도와 설교,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순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더 중요한 요소를 빼 버린다면 예배가 예배답지 않게 됩니다. 그 중요한 요소가 무엇일까요?

오늘 읽은 시편 50편 전반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드리는 제물 때문에 너희를 책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제물로 드리는 수소나 숫염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방 종교에서 드리는 제사는 마치 그들의 신이 배가 고파 필요한 것처럼 준비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드리던 제사를 보면 절차가 굉장히 까다롭고 복잡합니다. ‘어동육서’라고 해서 생선은 동쪽에 고기는 서쪽으로 놓고, 또 생선이라 해도 머리 쪽은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놓아야 합니다. 김치는 동쪽에 나물은 서쪽으로, 어떤 것은 왼쪽에 어떤 것은 우편에 놓는 등 위치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순서도 있습니다. 제 1열은 밥과 국, 2열은 젓과 전, 그 뒤에 3열, 4열, 5열 이렇게 정해진 순으로 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복잡한 절차는 한 마디로 제사에 정성을 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신들에게 호감을 얻어야 개인과 가정에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이처럼 형식적이고 기복주의가 된다면 이방 제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배에서 중요한 요소가 빠지면 그렇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잊을 수 있을까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의 생각하지 않고 예배자리에 한 시간 동안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견지망월’이란 사자숙어가 있습니다. 볼 견, 가리킬 지, 잊을 망, 달 월, 이 네 글자로 된 숙어인데 달을 보라고 손을 들어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쳐다본다는 뜻입니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지엽적인 것에 몰두한다는 의미이지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이렇게 견지망월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예배 형식이나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만일 성가대가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으실까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를 더 생각한다면, 또 듣는 분들이 찬양을 들으면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기보다 음정이 맞는지 화음은 제대로 어울리는지를 판단한다면 견지망월이 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 링컨이 1863년에 한 감사절 선언문에는 이런 의미심장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보전되고 평화와 번영을 누려왔다. 인구와 부, 국력 면에서도 어느 나라보다 앞섰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우리를 평화로써 지키시고 번영과 풍요, 힘을 베푸신 그 은혜의 손을 망각한 채, 이 모든 복이 우리 자신의 탁월한 지혜와 덕목 때문인 줄 착각하는 헛된 망상과 속임수로 지내왔다. 우리는 쉽사리 깨어지지 않는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구속과 보호의 은총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자만하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기도하기에는 너무나 교만해졌다. 따라서 이제 의무적으로, 우리가 거슬린 그 능하신 분의 존전에 겸손히 꿇어 나라의 죄를 자백하여 자비와 용서를 빌고자 하는 바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예배는 더 이상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처럼 생각하는 잘못을 쉽게 저지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잘못을 범합니다. 죄를 지어도 아무 일도 없으니 하나님이 그런 것에 별 관심 없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어 우리에게 뭔가 자꾸 요구하시는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부족한 것이 있으신 줄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예배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일까요? 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바로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 자체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에 담긴 감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방 신에게 드리는 예배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죄의 특성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면 생각과 마음이 허망해지고 어두워집니다. 감사가 빠진 예배는 마치 바람 빠진 튜브와 같습니다. 예배의 핵심요소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23절 을 보십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했고 말씀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도둑과 간음하는 자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혀로 거짓말을 하면서 형제를 공격하고 비방을 일삼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 그의 삶이 잘못되기란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행위를 옳게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감사의 예배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빌 4장 6절에서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그 분의 구원을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유대의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 연합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 압도적인 적의 군사력을 보고 두려웠지만 그 와중에서 그들이 드린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습니다.
역하 20: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0: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렸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이번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이 잊었던 감사를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를 통해 회복과 구원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감사하면 어두워진 마음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가 가까워집니다. 또 우리가 겪는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 동안 감사하고 싶은 내용을 글로 한 번 적어보시라고 권면을 드렸습니다. 아직 못하신 분은 오늘이 가기 전에 한 번 해 보시길 권면합니다. 제가 간단히 쓴 것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비껴간 것만 기적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삶이 기적임에 감사합니다.
제 삶 속에 많은 평범한 일상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숨을 쉴 수 있는 것, 아침에 힘들지 않게 일어나는 것, 두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임을 알고 감사합니다.
저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건강만이 은혜가 아니라 육신의 연약함, 약점과 실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제가 겸손한 자리에 머물도록 하는 은혜의 사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주셔서 가정의 소중함과 행복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갖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음을 감사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때가 많음에도 변함없이 저를 사랑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까지 제 모든 염려를 맡아 주심에 감사합니다.
고통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게 하시고 하늘 소망을 더 갖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영적 가족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한 분 한 분 보석보다 소중한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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