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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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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19-12-27 10:02 조회5,69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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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저희 집에 족보집이 한 권 있습니다. 원래 저는 이런 것에 관심이 별로 없는데 오랜 전에 종친회라는 곳에서 하도 강권하다시피 연락이 오는 바람에 매정하게 거절을 하지 못하고 샀습니다. 처음에 호기심으로 몇 번 펼쳐보다가 그 후로는 거의 보지 않아 먼지가 쌓였습니다. 언젠가 저는 아내와 같이 누가 더 뼈대가 있는 집안인가를 한 번 따져본 적이 있습니다. 아내의 성은 묘금도 유씨라고 하는데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가 자기 선조라고 하더군요. 그럴 리가 있을까 싶어서 한 번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정말 맞더군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묘금도 유씨 시조가 한고조 유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제가 가진 족보 책을 아무리 뒤져도 조상 중에 고려시대에 왕후나 조선 시대에 정승은 있어도 가문에서 왕이 나온 적이 없기에 요사이는 족보 이야기를 살짝 접었습니다.
 
보통 족보 이야기가 나오면 유명한 인물이었거나 높은 지위에 있었던 분들을 거명하지요. 범죄자 같은 경우는 당연히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좀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몇 몇 여자들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이죠. 여자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별 이상한 일이 아닐지 몰라도 당시 유대인의 관습으로는 굉장히 놀랄만한 일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인구 조사를 할 때 여성들은 숫자조차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또한 여성은 재산을 상속할 수 없었고 법정에서 증언할 권리도 없었지요. 족보에 여자이름이 등장한 것도 아주 특이한 일인데 더구나 등장하는 5명의 여자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뭔가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여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그런 여인들이 의도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여성을 보겠습니다.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자. 다말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유다에게는 원래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다말은 장남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런데 장남이 자식 없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계대 결혼 혹은 수혼이라고 해서 누군가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의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대를 잇게 해 주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둘째 아들도 죽고 말았고 마지막 셋 째 아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수혼 제도에 의하면 다말을 마지막 남은 셋 째 아들과 결혼시켜야 하지만 시아버지인 유다 생각에 아마 며느리가 뭔가 불길한 여자로 여겨졌든지 세 째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를 대고 그냥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세 째가 다 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연락이 없어 처량하게 지내던 다말은 마침 시아버지 유다가 자기가 사는 곳 근처에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한 가지 계략을 꾸미게 됩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마치 유혹하는 창녀처럼 길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유다는 자기 아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슬픈 마음을 겨우 추스른 상태였는데 지나다가 길가에 앉아있는 며느리 다말을 보게 됩니다. 그녀가 창녀인 줄 생각하고 말을 걸다가 결국 나중에 대가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증표로 개인 소지품을 맡긴 후 함께 동침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후 유다는 며느리가 간통을 해서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불같이 화가 난 유다는 당장 며느리를 끌어와서 불살라버리라고 하지만 막상 며느리 다말이 끌려와서 자기 소지품을 증거로 보여주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즉, 며느리가 세 째 아들을 주지 않자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 후로 유다는 다시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결국 다말은 시아버지의 아들을 낳게 되는데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쌍둥이 중 먼저 나온 아들이 베레스이며 이 베레스가 예수님의 조상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너무 창피해서 이 이름을 족보에서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다말의 이름은 당당히 예수님 족보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5절에는 두 명의 여인이 같이 등장합니다.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먼저 라합이란 여인입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 기생이라는 말은 조금 얌전한 말입니다. 원래의 말뜻은 창녀를 의미합니다. 다말을 창녀로 가장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했지만 라합은 실제로 몸을 팔던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그들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을 몰래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 정탐군들을 보호해 주었고 그 대가로 여리고성이 점령당하고 파괴될 때 죽임 당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녀는 살몬이란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의 이름이 보아스입니다. 보아스 역시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물론 라합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비천한 신분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사실 족보에까지 올릴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 드는 이름입니다.
 
그 다음 이름은 룻입니다. 룻은 이방인인 모압 여자였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을 때 나오미란 여자가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를 했는데 그곳에서 남편이 그만 죽고 맙니다. 그 후 남은 두 아들을 그곳에서 모두 모압 여자와 국제결혼을 시켰는데 또 연달아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아들들이 다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와 두 며느리, 모두 과부가 된 여자 셋이 남았습니다. 참 기구해도 이런 기구한 인생은 드물지요. 당시는 과부가 살아가기란 무척 어려운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닌 세 명의 과부가 남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희망이란 조금도 남지 않은 바닥 인생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결국 시어머니는 혼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두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로 결혼하고 새 가정을 꾸려 살라고 권면했는데 유독 한 며느리만 죽어도 어머니를 떠날 수 없다고 버티며 끝까지 따라 나섰습니다. 바로 그 며느리 이름이 룻입니다. 룻은 어머님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어머님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면서 시어머니를 따라 전혀 낯선 이스라엘 땅으로 마침내 베들레헴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구하러 밭에 나갔다가 그 밭에서 우연히 나이스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결국 그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입니다. 룻은 훌륭한 여자이긴 하지만 원래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하던 모압 과부였고 인생의 바닥을 경험한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당당하게 올렸습니다.
 
이제 또 다음 여인입니다.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 여인은 우리야의 아내인데 이름은 밧세바입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부하들이 전쟁터로 나간 사이 저녁 무렵에 왕궁 옥상을 혼자 한가하게 거닐다가 거기서 목욕하고 있는 여인을 보고 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하를 시켜 알아보고는 데려와서 같이 동침하게 되는데 그녀는 자신의 충성된 신하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다윗은 중대한 권력형 범죄를 저지른 것이죠. 더구나 밧세바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몰래 부하를 시켜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전투에 보내어 고의적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청부살인과 같은 죄였습니다. 그렇다면 밧세바는 죄로부터 자유로울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왕이었지만 전쟁에 나간 남편을 생각하면서 그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죽어도 절개를 지킨 우리나라 열녀의 모습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이름이 예수님 족보에 오른 것은 좀 부담스런 일입니다.
 
이제 마지막 여인입니다.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아마 이 때 마리아의 나이는 틴에이저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처녀였던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를 했지만 정작 문제는 요셉과 약혼한 상태에서 임신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관습으로는 약혼이란 같이 한 집에 살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결혼한 상태와 동일했습니다. 만일 약혼 상태에서 남편 될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 바로 과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법으로는 남편 몰래 임신한 처녀는 돌로 쳐 죽여도 될 중범죄였습니다. 하지만 남편 요셉은 꿈을 통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의 세상은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옥타비아누스는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 시대를 열었습니다. 로마 시내에 있는 야누스 신전의 문은 로마가 전쟁할 때 열어놓고 평화 시에는 닫았습니다. 그런데 늘 전쟁이 끊이지 않은 까닭에 그 문이 닫혀있던 때가 거의 없었지만 옥타비아누스 시대에는 굳게 닫혀 있었지요. 그렇게 평화 시대가 왔지만 그 평화는 사실 힘으로 유지한 평화였습니다. 그때 황제는 로마 제국 하에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호적을 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호적 조사를 실시한 이유는 유사시 얼마나 병력을 차출할 수 있는지, 또 수많은 건축 현장에 동원할 수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세금을 확보해서 쓸 수 있는 예산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였습니다. 사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지요. 하여튼 요셉은 호적 하라는 명을 따라 살고 있던 나사렛에서 100Km가 훨씬 넘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만삭이 다 된 아내를 데리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막상 도착해보니 모든 숙소가 차버려 잘 데가 없었지요. 사실 돈을 많이 준다고 하면 어디라도 못 가겠습니까만 무척 가난했던 그들은 결국 가축들을 가두는 장소를 겨우 얻게 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마리아가 해산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구유에 아기 예수를 눕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안타깝고 서글픈 현실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형편없이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결코 특별한 여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약자들이었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았던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루저라는 단어가 한참동안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루저란 실패자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요. 루저의 반대는 winner, 승리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말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요사이 젊은이들 중에 ‘만일 내가 부모님만 잘 만났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내게 좋은 환경만 주어졌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을 텐데’라고 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스스로 루저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성들 가운데 루저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도 마치 루저처럼 아무도 일아 주지 않는 가난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언제 예수님을 믿게 될까요? 인생이 잘 나갈 때일까요? 돈을 많이 벌 때일까요? 지위가 올라갈 때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인생이 추락할 때일까요? 저는 지금까지 인생이 승승장구하는 도중에 예수님을 갑자기 믿게 되었다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평범하게 살다가 믿는 사람은 있지만 그보다 인생이 갑자기 추락했을 때, 도무지 일어설 수 없이 절망 가운데 빠졌을 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끌어안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믿게 됐다는 말을 훨씬 많이 들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럴 때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그 때야말로 마음이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제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대학생 때 교회 나가던 저를 그렇게 반대하시던 어머니가 아버지 문제로 가정이 엉망이 되고 인생의 끝자락까지 내려갔을 때 비로소 마음이 가난해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갈급한 심정으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믿으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겪는 절망의 끝이 사실상 끝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절망이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사실상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새롭고 놀라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은 이 세상에서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 5장 3-4절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 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아주 흥미로운 번역 아닙니까? 인생이 벼랑 끝에 서게 될 때, 내가 작아질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었을 때 진짜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럴 때 보통 하나님을 찾게 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다 잃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더 큰 복입니다. 하나님을 절박하게 찾게 될 때는 우리가 벼랑 끝에 서게 될 때입니다. 기대하던 내 희망이 모두 사라졌을 때입니다. 내가 아끼던 소중한 것을 잃게 될 때입니다. 마음이 가난해 질 때입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동안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욕망, 돈, 명예, 세상 걱정근심 조차 헛된 것임을 깨닫고 이제 하나님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았던 것이 죄였음을 알고 슬퍼하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형편없는 존재인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아는 것입니다. 형무소에 있는 죄수들 중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순순히 말하는 사람들이 드물답니다. 대부분 억울하다고 변명하고 재수가 없어 그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의 이름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한번 볼까요?
마 1: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의 이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바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2,000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짐을 모두 지시려고,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려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흠 많은 여인들을 많이 언급하신 이유는 예수님 이름이 가진 뜻처럼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라고 믿습니다. 혹시 지금도 나는 이 세상에서 별 볼일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부끄러운 죄인이라 여기십니까? 혹시 루저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기뻐하십시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정말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또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이름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로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중에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을지라도 나는 당신 곁에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입이 없어도 나는 당신에게 애원할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을 마음으로 더듬어 품을 수 있습니다.
내 심장을 멈추어 주십시오. 나의 뇌가 맥박 칠 것입니다.
만일 나의 뇌에 불이라도 사른다면 나는 나의 피로써 당신을 운반할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시지요. 이 시는 릴케가 루 살로메라는 여성에게 헌정한 시인데 사랑을 뜨겁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런 사랑을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 수 있을까요? 릴케에게 직접 물어 볼 수는 없지만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죽더라도 나는 당신 곁에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혼 서약 때 보면 젊을 때나 늙을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늘 곁에 있기로 서약하는 것 아닌가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최고의 증거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최고의 표현은 무엇일까요?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있겠다.”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마음에 믿고 영접하면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랑이나 어떤 관계도 죽음과 동시에 끝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조차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예수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고 믿는 예수가 과거에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예수님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 분이 왜 오셨던지, 무엇을 하셨던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대하는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임마누엘의 예수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한 여인들처럼, 비록 내 자신이 인생의 밑바닥에 있다 해도, 과거에 수치스런 죄인이었다 해도, 2,000년 전에 오신 그 분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와 주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역사적인 예수가 아니라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2019년도 저물어 갑니다. 곧 다가올 성탄절, 저와 여러분에게 역사적인 예수님이 아니라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오셨을 뿐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 임마누엘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금도 언제 어디서나 늘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되신 예수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역사적 예수가 아닌 임마누엘의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이 저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습니다. 이제부터 저의 구세주와 주님이 되셔서 영원토록 저와 함께 하시옵소서.
그 이름 예수, 그 이름 임마누엘되신 주님 늘 함께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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