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대학교회

  • 2023년 표어

    '나가서 찾으라' (마18:12)

설교 및 칼럼

설교

홈 > 설교 및 칼럼 > 설교

설교

믿음으로 산다는 것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2-10 09:52 조회5,476회

본문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지난주에 왼쪽 눈이 침침해지고 시력이 떨어진 느낌이 있어서 친구가 운영하는 안과에 가 진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망막 중심에 염증이 생겼거나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노인성 황반변성인 것 같은데 좀 더 큰 병원에서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지요. 병원에 가서 진료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저도 정말 싫어합니다. 그 말을 친구로부터 듣고 와서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믿음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왼쪽 눈에 손을 얹고서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을지어다.’ 선포했습니다. 다음날이 되었죠. 어떻게 되었을까요? ‘완전히 나았습니다. 역시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아침에 보니 조금 더 심해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기도했을까요? 아닙니다. 주저 없이 바로 병원 갔습니다. 여러 검사를 거친 결과 가장 우려하던 진단을 받았습니다. 노화로 인한 황반 변성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65세 인구의 약 25%에서 생기는 병, 그냥 놓아두면 자칫 실명까지도 갈 수 있는 병이라 긴장이 되었습니다. 결국 제가 제일 싫어하는 주사를 맞았습니다. 저는 주사 바늘이 제 살갗에 닿는 것도 싫어하지만 그날은 어쩔 수 없이 주사를 맞았습니다. 그것도 안구, 눈알에 맞았습니다. 그 치료에 대해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저로서는 처음 겪는 일에 무시무시했지만 의사는 몇 초도 안 되게 주사를 놓고 안대를 붙이고는 집에 가면 바로 떼도 된다고 하더군요. 
 
병원에 가기 싫어 기도했던 그 믿음은 어디로 도망갔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믿음을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제 자신이 특별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한 치료의 은혜를 기대하며 지금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번 주에 이런 일을 겪으면서 과연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많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건강이나 가정사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믿음으로 감당하도록 가르치는 것과 본인이 직접 그 상황 속에서 실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론과 실제사이에는 엄연한 간격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은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구세주시며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왕, 나의 주인이심을 믿고 마음에 영접함으로 믿음의 삶은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후 주님께서는 내가 그동안 무지하여 전혀 보지 못했던 영적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이 끝이 아니라 이제 또 다른 믿음의 수업이 시작되었음을 서서히 알게 됩니다. 마치 부부가 결혼 선서를 통해 서로 남편과 아내로 인정하는 순간 법적인 부부 관계로 출발하지만 그 후 지지고 볶는 가운데 서로 의지하고 순종하며 성숙해 가는 과정이 평생 남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은 단 한번으로 족하지만 의지하고 순종하는 믿음은 평생 배워가고 자라가야 할 믿음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자라는 과정을 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어쩌면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할 수도 있습니다.
 
요사이 둘째 외손자가 집에 와서 소란스럽습니다. 제 자랑인 것 같습니다만 저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집중적으로 놀아주면서 빠른 시간 내에 아이들의 혼을 빼놓고 저의 열렬한 팬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처음에는 살짝 다가와 안기는 수준이라도 조금만 지나면 멀리서 달려와 점프하듯이 제 품으로 몸을 날릴 정도로 저를 신뢰합니다. 자칫 뛰어드는 것을 놓쳐서 다칠까봐 오히려 제가 조심해야 할 정도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이 놈이 나를 믿어도 단단히 믿고 있네.’라는 생각을 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이 놀자고 손짓만 해도 도망가겠지요. 손자 편에서 본다면 제가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믿는 것과 이 할아버지가 믿을만한 할아버지라고 여기는 것은 별개입니다. 이전에 유행하던 이런 유머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목욕탕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탕에 먼저 들어가서는 아들에게 뜨겁지 않으니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사실 어른이 느끼는 체감 온도와 아이가 느끼는 체감 온도가 다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말만 믿고 풍덩 들어갔다가 너무 뜨거운 나머지 놀라 뛰쳐나오면서 무심코 어디서 배웠는지 이런 말을 뱉었다고 하지요. ‘세상에 믿을 만 한 놈은 아무도 없네.’
 
신뢰하는 믿음을 위해서는 시간이 걸립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장입니다. 믿음으로 삶을 영광스럽게 수놓았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빽빽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11장은 명실상부한 하늘나라 명예의 전당편입니다. 우리 이름도 그곳에 부록으로 덧붙여질 수 있다면 이보다 영광스런 일이 없겠지요.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11장을 시작하기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들입니다. 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할 수가 있겠지요.
‘믿음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조금만 있으면 예수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동안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은 결코 뒤로 물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좀 힘들다고 생각이 들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믿음의 특성입니다.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매달렸던 한 이방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아주 차가운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자녀에게 주는 떡을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줄 축복의 우선권을 이방인에게 먼저 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뜻이었지만 언뜻 모욕적으로 느낄 만한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들은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개들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녀는 뜻밖의 거절감을 느꼈을 때 포기하지도 뒤로 물러가지도 않았습니다. 끝까지 참았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큰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다가 그만 중도에 포기하신 것이 있습니까? ‘이 기도는 벌써 10년 이상 드린 기도인데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잖아.’라고 생각하며 포기한 제목이 있다면 오늘부터 믿음으로 다시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어렵게 보이는 환경이나 문제를 만날 때 뒤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을 이런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한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었는데 그 도시에 살던 한 과부가 자주 그를 찾아 가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강청을 했습니다. 그 재판관은 힘없고 돈 없는 그녀를 계속 무시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찾아와서 너무 괴롭게 하는 바람에 결국 그 과부의 요구를 들어 주기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 끝에 주님은 불의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불쌍한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다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밤낮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지체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시간으로는 잠시 잠간 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오실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늘 오신다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믿음을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자, 36절을 다시 봅니다.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여기에서 필요한 인내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당장 어려움이나 문제가 해결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 약속하신 것을 받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 소망, 내 기대를 이루기 위해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어려움 가운데 빠지게 될 때 나타내는 몇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먼저는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의심과 회의적인 반응입니다. 이때는 불평과 원망, 심하면 분노의 감정이 따라오기가 쉽죠.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애쓰게 됩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어려움 속에서도 오히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조건 참으며 해 뜰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수동형이 아니라 능동형입니다. 바로 어려움 속에서 주저앉아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15여 년 전에 제가 그렇게 크지 않은 노인 병원을 경영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우연스럽게 주어진 기회를 만나 주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위기 상황이 왔습니다. 함께 일하기로 한 다른 두 사람이 불화로 그만 두게 된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오리라고 미리 예상했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나간 두 분이 각각 자금과 경영을 각각 맡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그만두는 바람에 혼자 남아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한 분이 투자한 자금을 돌려주기 위해 은행의 대출을 받아 갚아야 했고 해 보지 않은 경영도 혼자 책임을 져야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장 은행의 대출부터 막힌 것이었습니다. 가능한 곳을 두드렸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가까스로 서울에 있는 동생이 도와주어 서울 소재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 다음부터가 더 문제였습니다. 환자들이 와야 병원이 제대로 돌아가는데 그렇지 않아 계속 적자가 쌓여가면서 대출금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직원들 간에 갈등도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이런 일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혼자서 끌고 가기란 역부족임을 느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 빠졌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빨리 문을 닫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끝까지 해 보라고 권면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던 형제들조차 지금 문을 닫아도 그 빚을 평생 갚아야 될지 모르니 문을 닫으라고 진심어린 충고를 할 때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은 제 눈에 같아 보였습니다. 결국 받은 은행대출 잔고도 바닥이 났고 마지막으로 가까운 친척이 빌려준 몇 천 만원도 깨진 독에 물 붓기로 계속 빠져나가고 있어 제가 볼 때 파산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사실 이 모든 시작을 제가 믿음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다 보니 믿음 외에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환경 속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힘이 다 빠져 가라앉게 된 상황에서 기도하며 하나님께 SOS를 부지런히 쳤지만 하나님께서는 귀로 막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한 말씀에 유독 시선이 가서 몇 번씩 읽고 또 읽었습니다. 시 107 말씀이었습니다.
시 107: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107: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107: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107: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107: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말씀처럼 거의 1년간을 마치 요동치는 바다에서 롤링하듯이 혼돈과 고통 속에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끝에 있는 말씀으로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광풍을 고요하게 하시고 물결도 잔잔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되든 이 상황이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스스로 주어진 두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첫 째 내가 왜 병원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를 스스로에게 다시 묻게 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시작했고 더구나 오픈식 때 복음을 전하는 선교 병원이 될 것이라고 축하하러 오신 분들 앞에서 선포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막한 현실 앞에서 사명감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결심했습니다. 이왕 망하더라도 ‘사명, 즉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다가 떳떳하게 망하자’ 그 때부터 제가 할 수 없는 부분을 내려놓고 제가 할 수 있는 일, 즉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중년의 한 말기유방암 환자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훗날 다른 기회에 그 간증을 듣게 된 한 분이 지금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된 기적 같은 일이 후일에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복음전도야말로 병원이 존재하는 목적이라고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복음을 전했을 때 90세 넘도록 평생 절에서 살다시피 한 보살이 예수님을 믿는 드라마틱한 일도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헌금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현재 수입은커녕 1년 가까이 적자가 쌓이고 있는 현실에서 헌금을 드려야 하는가라는 문제였습니다. 당연히 수입이 없으니 빚을 내서 헌금을 드리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합리적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라는 생각이 미치자 하나님은 돈이 아니라 믿음을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은 어려운 중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마이너스 통장에서 계속 이전처럼 똑같이 헌금을 계속했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을 배웠습니다.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물질적인 여유가 있을 때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을 때, 물질이 없을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어려움 중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를 실천하며 참고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물에 빠진 사람을 익사하기 직전 구해주듯이 어느 날부터 하나님께서 간섭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잠잠하신 이유는 무관심이 아니라 믿음의 근육을 키워주시기 위한 사랑의 훈련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여튼 어느 날부터 갑자기 사방에서 환자들이 오기 시작하셨고 마침내 만 10년 후 전임 사역을 위해 폐업하고 모든 것을 정리할 때까지 빚을 다 갚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 때 배운 믿음의 교훈은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내 일을 해 주신다.’
 
믿음의 역사는 언제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안전지대를 떠날 때입니다. 자의든 아니면 타의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입니다. 불평과 원망을 선택할 것인가? 그냥 주저앉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와중에서도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인내할 것인가 하는 선택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어려움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청년들에게는 취업의 높은 문들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은 경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입니다. 어떤 분들은 건강의 문제, 어떤 분들은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마 세상 끝 날까지 우리에게 어려움은 쉴 새 없이 파도처럼 몰려올 것입니다. 그 어려움들은 우리로 믿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도록 유혹합니다. 뒤돌아서게 합니다. 내 스스로 코가 석자인 상황에 하나님 앞에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린다고? 네 자신의 일이나 돌봐라’고 핀잔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건강도 안 좋은데 쉬면서 이제 건강이나 챙기지’라는 내면에 속삭임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고생했는데 남은 인생이라도 좀 즐기면 어때.’라는 유혹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어떤 부정적인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삶입니다.

잠시 잠간 뒤면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이는 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살 것인가? 이것은 우리 각자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라질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자녀들답게 이 땅에서 남은 인생을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믿음으로 일평생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부산광역시 남구 수영로 309 경성대학교 건학기념관 3층 경성대학교회
Copyright ⓒ 2009~2018 경성대학교회.All rights reserved. Design by 메이크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