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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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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6-14 18:18 조회4,68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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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막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존 홉킨스 대학에서 슬럼가에 사는 200여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과연 성인이 되면 어떻게 될까하는 예측 연구였지요. 일단 전문가를 불러 아이들과 인터뷰를 한 뒤 물어봤습니다. 그들은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약 90% 정도가 인생의 절반을 교도소에서 보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 후 25년이 흘러 대학연구팀은 이미 성인이 된 당시 아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중 20명 정도는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약 180명이 소재가 파악되어 확인을 했는데 놀랍게도 단 4명 정도만 교도소에 있었고 나머지는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측과 빗나간 결과에 의문을 가진 연구팀은 조사를 하는 동안 그들에게 영향을 준 한 여자선생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찾아 만났을 때 먼저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 주었는지 물었습니다. 그 선생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전 그 애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어요. 단지 사랑한 것뿐이었지요.’
 
그녀가 단지라고 말한 것은 사실 그 아이들에게는 전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열악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서 사랑에 굶주려 있던 아이들은 그 사랑 때문에 삶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에서 사랑만큼 크고 위대한 힘이 없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인터넷,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중에서도 단연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바로 저와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분들입니다. 앞으로도 변화될 거고요. 그리고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오늘 제목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라는 제목입니다. 만일 누군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요? 아마 다양할 것입니다. ‘그럼요, 당연하지요’라며 바로 반응하시는 분, 주저하시는 분, ‘사랑하고 싶지만 잘 못하고 있어요.’라며 답답해하는 분, 쑥스러워하는 분, 또 마치 사랑을 강요받는 것처럼 부담스럽게 느끼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랑에 빠져 있을 때만큼 행복할 때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세상이 온통 핑크 빛으로 변합니다. 사랑은 강요에 의해 생기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랑을 자꾸 강요받게 되면 사랑하는 마음보다 오히려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당시 율법 해석자요 교사였던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것을 좋아하지요. 전통적으로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에 관한 613가지 계명 중에서 부정적인 계명 365가지, 긍정적인 계명 248가지로 분류했습니다. 부정적인 것이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하고 긍정적인 것이란 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모든 율법이 구속력 있는 것이지만 더 무거운 것과 더 가벼운 것으로 나누어 구분하였고 전체 율법을 하나로 요약하려는 시도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서기관은 모든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예수님께 물었던 것인데 자칫 논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쉐마’라고 하는 신 6장 4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여 답하셨습니다. 쉐마는 ‘들으라’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죠. 신 6장입니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가장 큰 계명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냥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사랑한다는 것..., 혹시 한 단어가 떠오르시지 않습니까? 제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한 단어는 바로 ‘열정’이란 단어입니다. 이 열정을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갈망’입니다. 열정은 특별히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솟아나게 됩니다. 저와 가장 가까운 한 분은 집안을 꾸미는 일이라면 밤을 꼬박 새워도 피곤하지 않다고 합니다. 저는 지켜보기만 해도 금방 피곤해지는데 말입니다. 저희 학교에 음악학과 교수 한 분은 일단 지휘봉을 잡기만 하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 몰입하게 만들 정도로 열정적으로 지휘를 합니다. 보통 두 시간정도 그렇게 전력으로 힘을 쏟고 나면 기진맥진할 것 같은데 연주 끝나고 물어보면 전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즐겁답니다. 정말 피곤하기는커녕 더 에너지가 넘쳐 보입니다. 한 번은 넉 다운이 되어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난 후 얼굴이 부은 채로 지휘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힘들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정’하면 그 분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만일 내 몸이 연료가 될 수만 있다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타오르는 열정 때문에 비록 내가 한 줌의 재가 될지언정 뜨겁게 몰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열정입니다. 그 열정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입니다.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여기서 열심은 헬라어로 ‘젤로스’로 ‘끓이다’, ‘뜨겁다’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다가 제사용으로 소와 양을 파는 장사꾼과 돈 바꾸는 환전상들이 성전 앞마당인 이방인의 뜰에 진치고 앉아 장사하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셨지요. 이 광경을 보던 제자들은 시편 69편에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정이 나를 삼켰다’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 때 그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마치 마른하늘에 벼락 치는 것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소와 양 떼들, 그들을 잡으려고 쫒아가는 상인들, 그리고 바닥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동전, 그것을 허겁지겁 주워 담는 환전상들, 그리고 옆에서 기가 막힌 듯이 바라보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잠시 아수라장이 된 것 같은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이 모든 상황을 압도하는 듯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예수님의 열정이 느껴지십니까? 그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공동번역은 ‘하나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듯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열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갈망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습니다. 사실 좀 더 사실적인 표현을 하자면 말씀은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렘 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다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너무나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갈망이 없으면 그저 눈으로 읽고 잊어버리게 되지만 갈망이 있으면 읽은 말씀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계속 묵상하면서 말씀을 먹게 됩니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께 대한 열정, 혹은 갈망이 없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정이나 갈망이 없다면 가장 큰 계명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사는 셈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자기가 맡은 일에 열심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물론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당연히 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에 대한 열정과 갈망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열정적으로 매달린다면 그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시간을 가지고 계십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을 찾으십니까? 정말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열정적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렘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 그 분 자신을 구하며 찾는 것입니다. 마치 마른 땅에서 비를 사모하듯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만일 이 사랑이 메말라 있다면 우리는 세상과 죄와 너무 가까이 붙어사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갈망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얼마 전에 책을 읽다가 어떤 글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19세기 남아프리카의 설교자이며 저명한 저술가인 앤드류 머레이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주님이 그에게 물으셨답니다.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냐?’
그러자 앤드류 머레이는 즉각 대답했습니다. ‘언제나 첫 째이십니다.’
그 대답을 하고 나서 스스로 참 대답을 잘했다고 자부했는데 주님은 그렇게 기뻐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했을까?’ 왜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 것 같을까,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에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대답을 잘못했구나.’
그래서 다시 주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답니다.
‘주님, 주님은 저에게 모든 것이십니다.’
그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느꼈다고 그가 썼습니다.

주님이 내게 첫 째가 되는 것과 내게 모든 것이 되는 것의 차이가 뭘까요? 지난주는 이것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자주 기도드리곤 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첫 째이신 것과 전부가 되신다는 것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제게 전부가 되길 원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할 때 마음에 왠지 부담감이 오곤 했지만 그 부담감을 무시하고 진심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이 기도를 드릴 때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마치 자신의 전부처럼 사랑하신다는 엄청난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사실 사랑은 나눌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자녀가 셋이 있다면 각각 33.3%씩 나누어 사랑하시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제 저의 두 딸들이 다 시집을 가서 애를 각각 둘씩이나 키우고 있지만 첫 째 딸이 먼저 시집을 가게 되었을 때 한 가지 일이 기억납니다. 같이 어디를 갔다가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보통 때는 저와 아내 사이에 두 딸이 어디에 끼든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제 하나밖에 없던 가정에 갑자기 또 다른 한 남자가 나타나자 둘째 딸은 자신이 어디 서야할지 갑자기 좀 당황스러웠나 봅니다. 그래서 자리를 형부에게 양보하고 나서 지나가는 말로 ‘이젠 난 셋째가 되었네.’라고 말하는 것이었지요. 당시에는 그냥 농담으로 받아 웃고 넘기기에는 상당히 뼈 있는 말로 들렸습니다. 혹 둘째 딸이 아빠 엄마의 사랑을 나누어 받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그 사이에 한 남자가 끼는 바람에 자신이 받아야 할 사랑을 또 빼앗겼다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 땐 그냥 웃고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지만 사실 귀중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형제들끼리 나누어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부모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몇 명이 되든지 간에 각각에게 모두 100%의 사랑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첫 째와 둘 째, 셋째, 또 넷 째...자녀가 많아질수록 받을 수 있는 사랑의 양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늘 누구에나 100%인 것입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를 안다면 그것으로 그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 각자의 마음에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어떤 증거가 필요한 것일까요? 이보다 더 큰 사랑의 증거가 어디 있을까요? 로마서에서 말씀하십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 알고는 있지만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아버지의 품안으로 선뜻 뛰어들지 못하고 문 밖에 서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제 멋대로 살다가 타락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마침내 돌아온 탕자,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품안에 안겨 그렇게 즐거워하고 있는데 큰 아들은 분노와 섭섭함으로 잔뜩 화가 나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아버지께 속한 그 풍성한 자원을 한 번도 요구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했고 그 때문에 고달프게 살았을 뿐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아버지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겨 떠나 제 멋대로 살다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절망, 공허감, 패배감, 죄에 찌든 초라한 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이전 행복했던 아버지 집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행여나 아들이 아닌 종으로 받아주시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염치 불구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해서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었습니다. 탕자가 왔을 때 아버지는 어떤 정죄나 어떤 비난도 하지 않았습니다. 멀리 시야에 그가 들어오자 너무나 반갑고 측은한 나머지 신발을 신은 채 마는 채 그냥 달려가 그를 덥석 끌어안았습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그저 풍성히 주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주었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고 발에 신을 신겨 주었습니다. 거기에다 살찐 송아지까지...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종종 탕자 같은 삶을 살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낍니다. 막상 자신은 큰 아들처럼 아버지께 선뜻 다가가지 못합니다. 들어와서 마음껏 누리라고 하시는데도 말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약점 과거의 실패, 현재의 연약한 모습에 집착합니다. 아직 아버지 집에 들어가려면 준비가 안 되었다고 스스로 채찍질합니다. 하나님의 무제한적인 사랑을 받기에는 자신이 아직도 부족하니 아버지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스스로 만든 의무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전혀 자격 없는 동생이 그런 사랑을 받아 누리는 모습이 영 못 마땅하고 불편합니다. 그는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조건적인 사랑으로 생각하니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부담스럽고 자신에겐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에 대해 자주 실망하고 죄책감으로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속을 바라보면 언제나 시꺼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은 하얗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았고 그 보혈로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속을 한 번씩 들여다보고 회개할 필요는 있지만 늘 바라보아야 하는 대상은 자신의 속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사랑하던 딸을 잃었습니다. 너무 사랑하던 딸이라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고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세월이 계속되던 어느 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아프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정말 미칠 지경입니다.’ 그 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답니다. ‘나도 내 아들을 보낼 때 그랬단다.’ 그동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수없이 말하고 전했지만 그 순간 비로소 그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로 깨달아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 우주의 유일한 존재라고 해도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언제나 100%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99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찾도록 찾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계산이 없는 법입니다. 그런 사랑을 입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하나님께 대한 열정과 갈망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구하며 교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마음에 그런 마음이 있나요?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 전부가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전부가 되는 삶이란 매 일상에서 가장 작은 일에까지 하나님 없이는 도무지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공부를 할 때도 놀 때에도 가정에서도 작장에서도 일을 할 때에도 쉴 때에도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고 여겨보십시오. 성경보고 기도할 때 100%, 공부할 때 50%, 놀러갈 때 20%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시간을 사용할 때 하나님께 드릴 시간을 먼저 떼어내는 것은 중요합니다. 물질 중에서 하나님께 먼저 드릴 부분을 떼어 놓는 것도 올바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전부로 여긴다는 것은 그 나머지 시간이나 물질을 사용할 때도, 우리가 볼 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어떤 사람들과 일상의 관계에서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 주에 이 주제를 가지고 한 번 더 이어가도록 여운을 좀 남겨두겠습니다. 이번 한 주 동안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갈망으로, 그리고 나 자신의 전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배우기를 소망합니다. 정말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면 얼룩진 세상이 핑크색으로 보입니다. 평상시 불편했던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깊은 은혜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시는 한 주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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