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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돌아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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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09-14 10:19 조회5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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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돌아보아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
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사실 그동안 우리가 유튜브를 통해서 온라인 설교나 강의를 듣는 정도는 친숙해지긴 했지만 비대면으로 주일 예배를 다시 드리게 되니 맞지 않는 옷을 다시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지금도 과연 비대면으로 드리는 예배가 정말 예배다운 예배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비대면 예배란 성도들이 모이지 않고 예배드린다는 뜻이지만 사실 굉장히 어색한 말입니다. 예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과 만남, 즉 대면해서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교계 내에서도 이런 예배에 대한 견해에 상당한 온도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단이나 교회마다 해석과 대응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뭔가 뚜렷한 해답이나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에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우리가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코로나 19사태를 통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엄중한 메시지를 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대부분 한국 교회는 주로 외형적 양적 성장에 주력해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대한 건물이나 많은 성도 수, 넉넉한 재정이 성공한 교회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는 이 모든 것이 허상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라인은 이 모든 것을 의미없게 만들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란 말이 있듯이 지금이 바로 우리가 돌이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때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추구했던 비본질적인 허상을 과감히 버리고 본질로 돌아서서 교회다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다움을 회복하게 하는 본질이 무엇일까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참된 예배와 공동체성이라 봅니다. 지난 주일에는 먼저 참된 예배로서의 삶의 예배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만일 주일날 드리는 예배를 한번 드리고 나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큰 오해일 것입니다. 우리는 일주일 내내 드리는 삶의 예배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삶의 예배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를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내 존전에 계시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 이렇듯 단순한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곧 영적 예배가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공적 예배든, 개인적인 예배든, 삶의 예배든 간에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즉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하심에 대한 응답인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2천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먼저 히 10장 19절에서 20절을 보겠습니다.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합니다. 가치가 있다는 뜻의 worth와 지위, 신분이란 뜻을 가진 ship의 합성어입니다.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것이 예배란 말이지요. 공적예배든 삶의 예배든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내 자신이 만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쁨과 만족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예배가 될까요? 예배 자리로 나아갈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 입니다. 어떤 예배든 예수님의 피를 힘입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지성소에 대제사장 한 사람만이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에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함부로 접근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으므로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지성소에 나아갈 때는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속죄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찢어 갈라놓으셨습니다. 사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은 사람의 손으로는 찢을 수 없는 두껍고 큰 것이었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게 갈라놓은 거대한 장벽과 같았던 셈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그 장벽이 제거되었고 우리가 자유로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담력은 NIV에서는 confidence 확신으로 번역되었지만 헬라어로는 ‘팔르레시안’인데 자유롭고 떳떳하게 나아갈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배드릴 때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필수요소, 가장 중요한 조건이 특정한 장소나 시간이 아니고 특별한 방법도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라는 사실을 예배 때마다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패나 부족함이 하나님 앞에 서는 일에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 보겠습니다.
히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 즉 지상의 집인 교회와 하늘의 집인 천국을 다스리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몸으로 친히 경험하신 분이시며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점 없고 흠 없는 보배로운 피로 마음에 뿌린 바가 되어 과거의 악한 양심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은 바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때를 따라 필요한 은혜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거짓이 없는 마음과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인증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켜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변함없는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든, 그렇지 못하여 각자 처소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 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있으므로 어떤 외부의 장애물도 우리를 못가게 막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을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3절을 봅니다.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미쁘시다는 말은 신실하시다,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는 도리란 무엇일까요? 바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완전한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 그리고 그의 긍휼하심으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면 받게 된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주님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서 살게 된다는 믿음에 대한 소망입니다. 어떤 사람이 요한 웨슬리에게 물었답니다. “만일 당신이 오늘 밤에 죽는다면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웨슬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하다니요? 예정대로 아침에는 설교하고 약속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이 되면 집에 가서 저녁 먹고 가족과 함께 기도하고 침상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천국에서 눈을 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소망을 굳게 잡는다면 아무리 상황이 변한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이 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 코로나시대지만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소망도 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 지금까지는 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회복해야 할 본질은 참된 예배에 있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격은 나의 행위나 공로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의 피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를 늘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평적인 관계도 있습니다. 24정 25절입니다.
히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붙들어야 할 수평적인 관계는 바로 공동체에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계명입니다. 서로 나눌 수 있는 계명이 아니라 하나와 같습니다. 어느 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서로 지체입니다. 그래서 서로 돌아볼 책임이 있습니다. 돌아본다는 것은 NIV영어로 Let us consider라고 되어 있습니다. 돌아본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 2: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누구보다 디모데는 빌립보 성도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라고 말합니다. 진실히 생각한다는 것은 잘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서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서로 돌아보게 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혼자인 사람은 없는 곳이다.’ 그렇습니다. 혼자란 느낌이 드는 곳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존 웨슬레는 이렇게 말했지요. ‘고독한 그리스도인보다 더 비 기독교적인 것은 없다.’
공동체와 조직은 다릅니다. 조직이 마치 옷과 같은 것이라면 공동체는 몸과 같은 것입니다. 조직이라는 것은 공동체를 위해 일시적으로 존재하며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버리거나 바꿀 수가 있지요. 하지만 몸인 공동체는 그렇게 못합니다. 몸에 있는 팔과 다리 등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고 많은 지체가 서로 돌보지 않는다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공동체는 서로 돌아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전 4장 9-11말씀입니다.
전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4: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4: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한 사람보다 둘이 함께 일하면 더 많은 것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실패하면 다른 사람이 붙들어 일으켜 세워줄 수가 있습니다. 둘이 누우면 더 따뜻해지듯이 서로 격려와 위로가 됩니다. 둘이 뭉치면 쉽게 꺾어지지 않고 위기와 역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으로 공동체로 계시는 것처럼 우리를 주안에서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공동체는 서로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토니 캠폴로 목사가 하루는 기독여성인회 연회에 초대를 받아 간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참 연회가 열리고 있는 도중에 회장이 나와서 어떤 선교사의 편지를 읽어주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대략 상황이 무척 어려운 상황이라 4,000불이 필요하다는 애절한 호소였습니다. 그 편지를 다 읽고 난 후 그 회장이 이 4,000불이 채워지도록 토니 캠폴로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지요. 토니 캠폴로는 그 회장의 요청에 자기는 기도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기도부탁에 거절하는 목사도 있을까요? 회장이 어리벙벙해서 쳐다보고 있자 토니 캠폴로는 기도는 하지 않겠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말하고는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서 약 1,000불을 탁자위에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기도해야할 일이 아니라 내어놓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나와서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기 시작했고 결국 4,000불이 훨씬 넘는 헌금이 모금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서로 돌아보는 일은 물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일로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도해 주는 것으로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는 유기체입니다. 단순한 조직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예수님의 같은 생명을 나눈 한 가족입니다. 만일 서로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 공동체는 아프거나 병들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나의 시간, 나의 물질, 나의 위로와  권면, 나의 사랑을 공동체로 흘러 보낼 때에 몸인 공동체는 다시 생명력과 활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합니다. 모이지 않는 것은 분명 성경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오심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만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두고 있고 비대면이 대면을 대치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눈 공동체이고 서로 돌아보아야 하는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이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돌아볼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무엇보다 각자가 이런 상황에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열어주신 새롭고 산 길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릴 수 있길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는 도리의 소망을 더욱 굳게 붙잡고 이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아니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길 소망합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하루 속히 서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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