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대학교회

  • 2020년 표어

    ‘'채우소서. 흐르게 하소서' (요 7:37-38)

설교 및 칼럼

설교

홈 > 설교 및 칼럼 > 설교

설교

누가 손을 대었느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0-11-22 07:51 조회340회

본문

누가 손을 대었느냐?
 
눅 8: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8: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8: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8: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8: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8: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8: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여러분 샌드위치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간혹 맥도날드에 가보면 햄버거 종류가 많이 있더라고요. 맛있는 빵 사이에 맛있는 고기와 야채가 옆으로 삐져나올 정도로 푸짐한 햄버거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돕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마치 샌드위치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읽은 구절인데요. 왜 샌드위치로 표현했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혈루증 앓던 여인의 기사가 한 이야기 중간에 살짝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앞에 시작하고 혈루증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중간에 낀 뒤 다시 야이로의 딸 이야기로 끝이 맺어지는 형식으로 되어있어 마치 샌드위치 모양과 같습니다. 이제 그 샌드위치를 함께 맛있게 드셔보십시다.

먼저 이야기 배경을 잠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 동쪽에 있는 거라사라는 곳으로 가셨을 때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돼지 떼에 귀신들이 들어가는 바람에 2천 마리가 되는 돼지가 바다에 빠져 몰사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지방 사람들이 제발 떠나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예수님은 다시 배를 타고 사역본부격인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가 환영했습니다. 아마 회당장 야이로도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급히 찾아왔을 것입니다.
 
당시 회당장은 회당의 책임자로 회당 건물의 운영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집회를 인도하고 예배의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또한 토라, 즉 율법을 낭독하거나 설교하는 사람을 선정하는 권리를 갖고 있었죠. 이렇게 볼 때 회당장은 지방에서 사회적 지위가 있고 존경을 받는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발아래 엎드리는 것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자세였습니다. 그는 주위의 시선과 체면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그 딸은 12살짜리 외동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12살은 이제 시집 갈 나이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나이에 죽는다는 것은 막 피어나는 꽃이 시들어버리는 것 같은 무척 슬픈 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청을 들으시고 일어나 그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야기를 곁에서 듣고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하여 더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을 따라가며 에워싸 밀었지요. 성경 본문에 ‘밀려들더라’고 번역했는데 원어의 뜻은 ‘질식시키다, 숨 막히게 하다’는 뜻입니다. 보통 아주 비좁은 장소에 사람들이 꽉 찼을 때 숨 막혀 죽겠다고 표현합니다. 아마 예수님 주위에 사람들이 꽉 둘러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와중에서 이동 중이셨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여인의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끼어듭니다. 어떻게 그 여인이 그 비좁은 사이를 뚫고 들어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인파 중에서 주님께 손을 댄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닐 텐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서시며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여인은 도저히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떨면서 나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기의 일을 소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환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열두 해, 12라는 숫자가 두 번씩 언급되고 있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야이로의 딸의 나이도 12살, 이 혈루증 여인이 앓은 해도 12해였습니다. 보통 수사학적으로 7이란 숫자는 충족수를 가리키고 12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열 두 명이듯이 말입니다. 결국 이 열 두해라는 숫자는 그 여인이 겪을 수 있는 완전한 절망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 여인은 몰래 군중들을 비집고 들어와 예수님 뒤쪽에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여기서 옷 가는 원래 예수님이 걸치신 옷자락 끝에 있는 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예수님의 옷 술에 손을 대었다고 번역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원피스 같은 겉옷을 입었고 옷의 네 귀에 술을 달았습니다. 이 술은 권위와 위엄을 상징했으며 가족 외에는 만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혈루증을 앓던 부정한 여인이었으며 허락도 없이 만진 것이었습니다. 혈루증은 지속적으로 하혈하는 부인병의 일종으로 부정한 병으로 간주되었으며 레위기에 보면 그녀가 앉는 자리, 그녀가 만진 것까지 부정해졌습니다. 따라서 그녀가 사람을 접촉하는 것 자체가 비난받고 쫓겨나야 마땅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녀의 사정은 절박했습니다. 무려 12년이나 이곳저곳 좋다고 하는 의원은 다 찾아다니면서 괴로움만 당하고 가지고 있던 재산도 다 날리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절망 상태였지요. 그 때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예수님이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시시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야이로가 한 것처럼 감히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부정한 병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군중들 틈으로 끼어 들어가 몰래 뒤에서 손만 대어도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보면 뒷자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뒷자리를 찾는 분은 여러 사정이 있습니다. 보통 늦어서도 그럴 수도 있고 때로는 ‘나는 믿음이 약해서 앞으로 나가기가 뭣해.’ ‘내 사정을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어.’ ‘혹시 누가 말 걸까봐 걱정이라 뒤가 편해.’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뒤에 앉을 수 있습니다. 지금 뭔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줄 모르지만 지금 혈루증 앓던 여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속사정을 털어놓기도 어려웠습니다. 인파 때문에 접근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녀가 다가간 곳은 예수님의 뒤쪽이었습니다. 앞쪽뿐 아니라 뒤쪽에서도 주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관계없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믿음입니다.
 
데이비드 리스만이란 미국의 사회학자가 1950년 출판한 책 ‘The lonely Crowd’ 고독한 군중이란 책이 있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책 제목처럼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여도 말하기 어려운 고독을 경험합니다. 나의 깊은 사정을 알아줄 사람도, 믿을 만한 사람도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꽤 유명한 개그우먼이 어머니와 같이 삶을 스스로 마감한 슬픈 일이 있었죠. 햇빛 알레르기로 인한 고통, 엄마 빼고는 위로받지 못하는 외로움, 남을 웃겨서 행복하다고 하던 그녀는 결국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너를 혼자 보낼 수 없다는 엄마와 같이 세상을 포기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지만 우리에겐 모든 것을 이해하실 뿐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주님이 계십니다. 비록 누가 내 사정을 몰라주어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어려워도 주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처럼 예수님을 만지십시오. 믿음으로 접촉할 때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었지만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 믿음으로 손을 댄 여인에게만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습니다. 불같은 믿음이 있고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강한 믿음이 있고 약한 믿음이 있습니다. 표시가 나든 안나든 강하든 그렇지 않든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비밀입니다. 믿음은 누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 믿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 날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장하실 때의 겉모습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들었을 때 놀라 ‘도대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하면서 예수님이 이상하게 변했다면서 도리어 배척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을까요? 막 6장 5-6절을 봅니다.
막 6:5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가장 예수님을 잘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잘못된 선입관 때문에 예수님을 가장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편견과 불신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의 단순한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불치병에서 놓이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타성에 젖게 됩니다. 주일 예배에 대한 별 기대도 없어지고 말씀에 대한 갈급함도 사라집니다. 마치 예수님 가까이 있으면서도 주변에서 맴도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우연히 예수님을 스쳐도 다른 사람들에게 떠밀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아무리 오래 지속된들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부도체처럼 되지 말고 자석처럼 되십시오. 예수님 근처에서 맴도는 신앙에서 벗어나십시오. 혈루증 여인과 같이 믿음을 나에게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은 예수님께 접촉하는 것입니다. 내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떤 말 못할 고통을 품고 계십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 혈루증 여인처럼 주님께 나아와 주님의 옷깃에 손을 대기까지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포기하시기 전까지는 우리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믿음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 그녀의 혈루 근원이 치유되면서 증상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마 여기서 이야기가 끝이 났다면 우리도 그 여인에 대해 더 이상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녀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래서 그녀는 할 수 없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사정과 예수님 옷자락을 만지게 된 경위를 털어놓았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속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공중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고백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 앞에서 한 고백이었지요. 하지만 믿음은 고백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이라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녀가 모든 사람 앞에서 왜 고백을 하도록 하셨을까요? 그녀를 보내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아봅니다.
막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아마 그녀가 아무도 몰래 병 고침만 받고 가버렸다면 훨씬 더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부르는 것처럼 ‘딸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녀의 믿음으로 그녀가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축복하십니다. 평안은 히브리어로는 ‘샬롬’이지만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진정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요?

믿음의 고백은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 믿음의 고백은 내 믿음을 더 강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믿음의 축복을 전이시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죠.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끝맺음을 하겠습니다. 다시 야이로의 딸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아마 야이로는 마음이 급했을 것입니다.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불쑥 나타나 돌발적으로 일을 만드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딸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야이로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을까요? 저도 그런 경우를 가끔 경험했습니다. 노인 병원을 할 때 환자상태가 아주 긴급한 경우는 급히 앰블런스를 호출해 같이 타고 큰 병원 응급실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혹시라도 중간에 차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싸이렌을 울려도 차들이 비켜줄 공간이 나지 않을 때, 일분일초가 급한데, 아직 도착하려면 10분 이상이 남았을 때, 그 10분이 가늠할 수 없는 영원한 시간으로 느껴집니다. 사실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고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제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해집니다. 아마 야이로의 마음이 이런 상태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정말 염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야이로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실 때 집에서 사람이 달려와 말합니다. ‘당신 딸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을 모셔 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괜히 선생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옆에서 들으신 주님은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 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다 해도 희망을 솟아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저도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상황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될 때, 주위 사람들도 포기하기 시작할 때, 아니 포기하라고 말할 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제게 얼마나 힘과 용기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도 절망적이었지만 야이로의 딸은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혈루증 앓던 여인의 이야기와 야이로의 이야기는 절망이란 공통적인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은 동일하게 믿음이었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딸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은 야이로에게뿐 아니라 이제 모든 것이 절망이라고 생각되는 환경가운데 있는 모든 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힘내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십시오. 비록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없어도, 자신의 연약함과 부끄러움 때문에 용기가 생기지 않아도 뒤에서 몰래 손을 대었던 여인처럼 예수님을 접촉하십시오. 그런 시간을 가지십시오. 대표적으로 아침 QT가 바로 그런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 관한 소문을 듣고 난 후 기도와 믿음으로 내 스스로가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시간인 것입니다.
 
일본에서 빙점이란 소설로 유명해진 ‘미우라 아야꼬’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척추결핵으로 수년간 누워서만 지내야 했던 고통으로 자살도 시도하지만 어느 날 같은 폐결핵으로 요양하던 ‘마에가와 다다시’라는 청년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후 마치 혈루증 앓던 여인처럼 고침 받고 일어섭니다. 그녀가 한 말 중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파야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있다. 아파야 믿을 수 있는 기적이 있다. 아파야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있다. 아파야 접근할 수 있는 성소가 있다. 아팠기에 기도했고, 아팠기에 기적을 믿게 되었고, 아팠기에 말씀을 들었고, 아팠기에 교회를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저와 여러분에게 절망이나 아픔을 주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예수님 주변에 서성대기보다 예수님께 직접 나아가십시오. 많은 군중들처럼 접근을 막는 요소가 많아도, 남에게 이야기하기 어렵고 부끄럽더라도,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도 예수님께 가면 해답이 있습니다. 그 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은 해결하실 수 있다고 고백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만일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셨다면 숨기지 말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나누십시오. 그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이 시간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치유하시고 더 큰 소망과 평안을 선물로 주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시고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경성대학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부산광역시 남구 수영로 309 경성대학교 건학기념관 3층 경성대학교회
Copyright ⓒ 2009~2018 경성대학교회.All rights reserved. Design by 메이크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