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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걸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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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1-03-09 09:46 조회3,4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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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걸으라

행 3: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3: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3: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3: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3: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정말 천지개벽할 일이었습니다. 불과 두 달 남짓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잡혀 가실 때에 예수님 이름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를 비롯해서 뿔뿔이 도망쳤던 열 제자들이 갑자기 백성들 앞에 나타나서 겁 없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처형을 주도했던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놀라고 당황스러웠을까요? 더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사도들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 중에 삼 천 명이나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은 사람들은 서로 물건들을 통용하고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이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며 날마다 성전에 모였고 집에서는 함께 기쁨으로 떡을 떼고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갈수록 점점 늘어 갔지요. 이런 즈음에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제 9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궁금한 사실이 있습니다. 함께 가고 있던 베드로와 요한의 관계에 대해서 말입니다. 분명 베드로는 충동적이고 주도적이면서 행동파였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끼리 밤중에 배를 타고 가다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장면을 본 그는 자기도 물 위를 한 번 걸어보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을 했지요. 예수님의 허락을 받고 다른 제자들이 숨죽이고 보는 가운데 혼자 물위를 걸어가던 그가 그만 파도와 물결을 보고 겁나 물속으로 빠져버렸지만 말입니다.

요한은 어땠을까요?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요한일서 등의 서신서를 보면 정말 사랑, 사랑으로 충만한 사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젊은 날에는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와 그의 형제 야고보에게 별명을 하나 붙여주셨는데 그것은 우레, 곧 천둥의 아들이었습니다. 맨 하늘에 천둥이 꽝 치는 듯한 성격을 나타내는 별명을 아무 이유 없이 붙여주셨겠습니까? 한 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들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받아주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참지 못하고 말했지요.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라고 명할까요?’ 이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지만 이 일을 보면 요한도 원래는 좀 급한데다가 화를 쉽게 내는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아마 서로 부딪히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나이 차이는 좀 있었겠지만 묘한 경쟁 심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베드로에게 순교할 것을 암시하시자 베드로가 뒤에 따라오던 요한을 보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은 질문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통 불같은 성격의 두 사람이 만나면 쉽게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사도행전 8장에 사마리아 선교할 때도 두 사람이 사이좋게 같이 붙어 다니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려 함께 가면서 성전 문 앞에 있던 병자 걸인을 보고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교회는 서로 부딪히기 쉬운 성격과 성향들이 만나 부딪치면서 함께 조화를 이루고 함께 협력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곳입니다. 세상에 어디 나와 똑같은 사람이나 마음에 딱 맞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영원한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란 갖가지 모양의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라 많은 문제를 잉태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함께 가면서 변화되고 성숙해 가는 공동체입니다. 하늘나라 가는 길은 함께 가는 길입니다. 혼자서 가기가 어렵습니다. 서로 붙들어주고 서로 격려해 주며 서로 짐을 져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깨어지고 성령님으로 녹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깨어지고 녹아서 사랑의 사람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말씀합니다.
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입니다. perfect bond of unity, 우리가 아무리 많이 모여도, 아무리 자주 모여도, 아무리 열심히 모여도 서로 간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사랑으로 하면 어려운 것도 쉬워집니다. 다음 주부터 성경공부와 기도회, QT 나눔을 온라인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모임도 사랑으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ZOOM을 어떻게 사용할지 모르는 분도 계시고 특별한 사정으로 그 날 참여 못하신 분도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제게 전화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대면이 아닌 비대면이 주류가 되는 시대가 올지 모릅니다. 평상시에 비대면, 온라인으로 하다가 한 번씩 대면으로 만나게 되는 패러다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교회가 도심이나 건물에 집착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이런 시대를 준비하는 마음에서라도 이번 주부터 하는 모임에 많이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또한 앞을 보고 갈 뿐 아니라 옆도 살펴야 합니다.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구걸하는 사람에게 눈을 돌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때로는 옆 사람 때문에 나의 걸음을 멈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옆에는 붙들어 일으켜야 할 사람들이 있고, 뒤에서 밀어주어야 할 사람이 있으며 때로는 사랑으로 질책해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살전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게으른 사람은 격려할 대상이 아니라 권계할 대상입니다. 게으르다는 말은 원래 군사 용어로써 낙오된 병사를 의미하는데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 일을 하지 않으며 남의 신세만 지는 사람을 의미하지요. 권계하다는 말은 경고하다, 충고하다는 말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알면서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하도록 자극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반면에 마음이 약한 자는 여러 사정으로 낙심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용기를 북돋워 주며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만 어떤 문제로 인해 할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지하철 열차 안에서 한 꼬마 아이가 계속 시끄럽게 하는 바람에 주위의 시선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그 아이를 그냥 놔 둔 채 한 쪽만 응시하고 있었지요. 참다못해 옆의 사람이 아이를 어떻게 해 보시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정신이 들었었는지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방금 저 아이의 엄마가 병원에서 죽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짜증난 눈초리로 바라보던 승객들의 시선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갑자기 모두 동정의 시선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잘 알 수 없지만 우리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이 모르는 문제로 고통하고 있는 분들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는 있지만 할 용기와 힘을 잃고 마음이 약해져 있는 이들을 우리는 격려해서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힘이 없는 자는 붙들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힘이 없는 자는 몸이 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약하다는 뜻입니다. 문제나 어려움을 만났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고 할 수 있도록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제가 간혹 개인적으로 만나고 있는 한 외국인 유학생이 연락이 왔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서 너무 우울하니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났습니다. 듣고 보니 한국의 법을 잘 이해를 못해서 한 실수로 인해 경찰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몰라 고민하다가 연락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내 관련 부서의 교수에게 연락하고 같이 만나 도와 줄 방법을 찾았습니다.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그에게는 이렇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당신이 살다보면 당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 때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그 나라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신앙은 없었지만 함께 기도하자니까 순순히 기도에 동참했지요. 다행히 함께하던 교수가 아는 경찰과 변호사를 통해서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전해 주었을 때 얼마나 그의 얼굴이 밝아지는지....그래서 또 같이 기도했습니다. 고마워하는 그와 함께 그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말로 이런 기회로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제가 기도했지요.

물론 우리가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지만 우리가 가진 최선으로도 얼마든지 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믿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은 경고하고 때론 책망해야 합니다. 알면서도 할 힘이 없는 사람은 경고가 아니라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은 가르쳐주고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서로 돌아보아 서로 붙들어주고 기도해 주는 아름다운 경성의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베드로와 야곱이 성전에 올라간 시간은 9시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하루 3번, 즉 아침 점심 저녁으로 기도했습니다. 유대인의 시간을 오늘날 시간으로 환산하자면 6을 더하면 됩니다. 그래서 9시는 오후 3시가 됩니다. 첫 초대교회 성도들은 12제자들을 비롯해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관습을 하루아침에 버리지 않았지요. 기도와 기적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기도하는 곳에 기적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많은 좌절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사실은 이럴 때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과거처럼 밖에도 자주 나가지 못할 때 우리는 무릎을 꿇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할 때 아무리 주위가 어두워도 하나님의 빛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로 일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로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닌지, 아니면 혹시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닌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미문,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앞에 두고 구걸하도록 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도와주어야 붙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코로나 시대에 교회 모임이 제한되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앉은뱅이와 같습니다. 혼자서 걸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나마 누군가 교회에서 붙잡아 주면 붙어 있다가 그냥 놔두면 세상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 버립니다. 이 앉은뱅이 걸인은 성전 바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이란 오늘은 얼마나 벌 수 있을까가 주 관심사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은과 금에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지요. 오늘날 교회에 나오면서도 그의 주관심이 은과 금, 즉 물질에 있다면 그는 앉은뱅이 신자가 아닐까요? 

어떤 분들은 그 앉은뱅이를 성전 미문에 데려다 놓고 가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교회 문 앞까지는 데리고 오지만 그 후에는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관심은 있으나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전도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아무 일도 안하는 사람보다 낫지만 사람들을 교회 앞에 데려다 놓고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 모르거나 교회에 맡겨버리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에 들어가던 중에 그 앉은뱅이 걸인이 두 사도를 보고 구걸을 했습니다. 아마 조그만 통을 갖다놓고 동전이라도 던져 주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냥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베드로와 요한은 멈춰 서서 그를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라고 말하자 그 앉은뱅이는 돈 몇 푼이나 얻을 수 있을까 하면서 뚫어지듯 쳐다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행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당신이 바라는 돈, 은과 금 같은 것은 없지만 내게 있는 이것을 준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금과 은만 있으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비슷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금과 은에 관심을 갖다보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능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13세기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2세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이노센트 2세는 로마 교회에 들어온 막대한 양의 헌금을 세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마침 찾아온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고 교황이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이것 좀 보게 토마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말 그렇군요.’라고 맞장구치면서 뼈 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교회는 일어나 걸으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은과 금은 엄청나게 소유하게 되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진 권세와 능력을 잃어버린 중세교회는 더 이상 영혼을 살릴 수 없는 무기력한 종교가 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돈을 많이 모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능력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많은 교회의 모습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그 미문에 앉아있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평생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던 그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들어가지 못했던 성전 안으로도 들어갔습니다. 그의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보고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능력과 경건함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을 성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가장 귀하신 이름, 가장 권위 있는 이름, 가장 능력 있는 이름입니다. 이름은 무엇보다 다른 것과 구별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얼굴이 같은 쌍둥이 형제라도 이름이 다르기에 구별이 됩니다. 이름은 존재 자체와 동일시됩니다. 존재가 있기에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기에 존재가 됩니다.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그를 알게 됩니다. 이름은 곧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이름입니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대신 행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이 내 삶 가운데 어떤 위치에 있을까요? 만유에서 가장 뛰어나신 그 이름이 내 삶에서도 가장 존귀한 이름이 되고 있을까요? 나는 내 이름보다 예수님의 이름을 더 높이고 있나요?

금과 은이 절대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이 그를 일으켰고 뛰게 했으며 찬송으로 하나님을 높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의 능력이고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의 도움입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의 이름을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영적으로 가난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와 같을지 모릅니다. 이사야서에서 말씀합니다. 
사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제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뿐 아니라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켜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앉은뱅이를 고칠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이고 그를 붙잡아 일으키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이름이란 놀라운 권위를 행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것은 금과 은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금과 은을 나누어주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사회에서 그늘진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물질로 돕는 일이 필요하지만 만일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등한시한다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선포하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3장 16절입니다. 
행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은 일차적으로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입니다. 물론 앉은뱅이도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021년도 새로운 한 해에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이름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 고침 받은 한 사람을 통한 파급력은 컸습니다. 비록 이 일로 사도들이 투옥되기도 했지만 믿는 자가 다시 오천 명이 생겼습니다. 옥에 갇혔던 사도들이 풀려난 후 교회는 합심해서 표적과 기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을 때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비록 지난 한 해는 코로나로 위축이 되고 주저앉아 있었을 때가 많았지만 이제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원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약해진 무릎을 일으켜 세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신앙으로 변화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주위에 영적으로 주저앉아 있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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