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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보다 긍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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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1-03-09 09:47 조회10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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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얼마 전 매스컴을 통해서 양부모의 학대로 세상을 떠난 정인이의 실상이 알려지자 우리는 슬픔을 넘어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작년 가을 어느 날 응급실에 도착한 정인이는 세 번 심장이 멎은 후 끝내 숨을 거뒀었는데 응급실 의료진이 보기에 아이의 상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교통사고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수의 골절과 장기까지 파열이 된 상태였던 것이었지요. 생후 7개월 무렵 양부모에게 입양된 정인이는 새 둥지를 튼 지 10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6개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인이가 안치된 경기도 양평에 있는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모인 몇 몇 목회자들은 찬송을 부르며 목이 메었고 “할 말이 없구나, 외롭고 슬프고 괴로운 길을 떠난 정인아! 우리가 모를 아픔…”이라며 깊이 탄식했습니다. 그리고 연신 눈물을 훔쳐내었지요. 그리고 “한국교회가 껍데기 신앙을 내던지고 제대로 된 양심을 회복하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돌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 한국교회를 용서해 주소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어른들을 용서해 주소서.”라는 가슴이 저린 기도를 함께 드렸습니다.

가장 충격적이고 당혹스러웠던 사실은 정인이의 양부모가 소위 모두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기독교 집안이 아니라 모두 목회자들의 자녀였고 두 사람 모두 잘 알려진 기독교대학 출신의 캠퍼스 커플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계에 상상하기 힘든 놀람과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에서는 지난 4일 “정인 양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한다. 그리고 정인 양의 양부모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대신 깊은 사죄를 드린다.”고 공식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정말 저도 이 뉴스를 접하고 나서 거의 비슷한 나이의 외손녀가 눈에 선하게 떠올랐고 바로 그 나이에 그렇게 혹독한 고통 가운데 갔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사이 코로나 시대에 기독교가 공공의 적처럼 몰리고 있는 이때에 우리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물론 극히 일부에서 일어난 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 10장입니다.
전 10:1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잘못함으로 인해 받게 되는 사회적인 비난은 잘한 수 백 가지 일들을 완전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똑같은 잘못이라 해도 기독교인에 대한 사회의 기대와 기준은 훨씬 엄격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정인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요사이 입양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아동 학대의 경우 친부모에 의한 것이 53%인데 비해 양부모에 의한 것이 0.3%일 정도로 극소수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큰 잘못으로 인해 선한 이웃들이 덤으로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는 갈수록 긍휼이란 단어를 주위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긍휼은 자비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영어로는 compassion이지요. 이 단어는 com과 passion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로 com은 ‘함께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passion은 ‘열정’이란 뜻도 있지만 ‘수난, 고통’이란 뜻도 있습니다. 긍휼은 후자의 뜻으로 ‘함께 고통 한다.’는 의미이지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한 가지 비유를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지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초죽음이 된 채 길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마침 그 때 제사장이 지나가지만 피하여 갔고 다음에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도 그냥 지나쳐버렸습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됩니다. 10장 33절에서 말씀합니다.
눅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33 But a certain Samaritan, as he journeyed, came where he was: and when he saw him, he had compassion on him (KJV)

사마리아인들은 비록 유대인에게 멸시와 배척의 대상이었지만 이 사마리아인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compassion, 즉 긍휼한 마음에 이끌려 그를 짐승에 실어 주막으로 데려갔고 다음날 아침까지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떠나기 전에 주막 주인에게 경비까지 주면서 돌보아 줄 것을 부탁했으며 추가 경비는 돌아와서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란 상대방이 누구인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가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옆집에 가서 칼을 좀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갔는데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웃이 빌려 주지 않은 것이죠. 그런데 며칠 후 이번엔 반대로 그 이웃이 칼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전달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어떻게 하실까 궁금해 하면서 말이죠. 아버지는 아들에게 칼을 선뜻 빌려주라고 했습니다. 이 때 아들은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이 반문합니다. ‘아니, 며칠 전 제가 칼을 빌리러 갔을 때 빌려주지 않았는데 왜 그 집에 빌려 주어야 하나요?’ 이 때 아버지가 말했답니다. ‘그 집에서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복수다. 그 집에서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빌려주겠다고 말하면서 빌려둔다면 이건 증오다. 하지만 거절당했다는 것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빈 마음으로 칼을 빌려주는 것이 바로 긍휼이란다.’

상대방이 과거에 나에게 어떻게 대했는가가 아니라 상대방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볼 수 없다면 긍휼의 마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반항하고 대적하며 불순종하며 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의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몇 년 전 신문기사에 나온 이야기가 심금을 울렸습니다. 거의 매일 술 먹고 일을 하지 않는 아들에게 어느 날 어머니가 잔소리를 하자 언쟁이 벌어졌고 아들은 홧김에 의자를 가지고 어머니에게 내리친 다음 흉기까지 휘둘렀습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어머니는 죽어가면서도 도망가는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고 도망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내가 아닌 상대방의 처지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들에게 너희가 찾는 예수가 바로 나라고 하시고는 내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끝까지 제자들의 안전을 구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주님은 긍휼의 사랑을 잊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에베소서에서 말씀합니다.
엡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만일 우리가 다른 이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긍휼 안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겸손이 있으며 또 공감이 있습니다. 긍휼은 부드럽고 친절합니다. 긍휼은 자리에서 일어나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그냥 있으면서 결코 긍휼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긍휼은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힘없고 연약한 자들과 함께 힘없고 연약한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 4장 15절입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수 있는 이유는 연약한 우리와 같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년 동안하신 짧은 사역 가운데 나타난 두드러진 모습이 있다면 바로 긍휼, 즉 불쌍히 여기신 일입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막 8: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주님은 늘 영혼을 향한 긍휼에 이끌리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실 때도, 병자를 고쳐 주실 때도, 무엇을 하시든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시고 소리 내어 우시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약함을 아십니다. 자주 실패하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에게 기대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주님은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인들은 죄인들과 세리를 가급적 멀리하는 것이 자신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비결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의 행동을 비웃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들과 함께 웃고 그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주님은 의사가 아픈 사람에게 필요하듯이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흘러 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긍휼의 마음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채워지지 않고 흘러 보내기만 한다면 금방 고갈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배달하는 배달부입니다. 우리 속에서는 긍휼이 솟아나오지 않습니다. 이 긍휼의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그 긍휼로 채워지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받은 그 긍휼의 사랑을 계속 나누어주고 흘러 보내는 것입니다. 흘러 보내지 않는 샘은 썩어버려 웅덩이가 되고 말지만 흘러 보내는 샘은 늘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지만 막상 다른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을 볼 때는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마치 강도만나 쓰러져 있는 광경을 보면서 모른 채 지나쳤던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사랑과 긍휼에 목말라 죽어가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나누어야 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말하기를 ‘사람들이 빵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나누지 않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약 성경 룻기를 잠간 볼까요? 남편을 떠나보낸 룻은 역시 과부가 되어버린 시어머니 나오미와 작별하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그 자유를 포기하고 나오미를 따라서 생전부지의 땅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나오미를 향한 긍휼한 마음으로 출발한 그녀가 낯선 땅에서 만나게 된 것은 또 다른 긍휼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새로운 남편이 될 보아스였지요. 베들레헴 지방의 유지였던 보아스는 고국을 떠나 시어머니와 함께 온 그녀를 룻의 처지를 알고 긍휼히 여겼으며 그녀를 돌보아 주었고 마침내 경제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룻의 남편이 되어 후대를 이어주는 역할도 감당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죄로 인해 끊어질 듯 말 듯 하던 메시아의 계보가 그들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간의 긍휼이 만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긍휼은 옳고 그른 것을 먼저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옳고 그른 것에 집착하는 나머지 소중한 긍휼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올해 102세가 되신 김형석 교수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930년대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말, 교장이었던 맥큔 선교사가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장직에서 해임되어 한국을 떠나게 되자 같은 반에 있던 시인 윤동주는 자퇴하고 만주로 갔고 김형석 교수 자신도 자퇴했습니다. 그 때 평양 기독교계의 유지들이 모여 고민하다가 500명이 넘는 한국 학생들을 일본 학교에 맡길 수는 없으니 신사참배를 하더라도 우리 아들들을 우리가 키우자는 결정을 내렸고 마침내 교회 장로였던 정두현 선생이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김형석 교수는 1년 동안 독학을 하다가 스승의 권고로 복학을 했는데 4학년 학생으로 복학한 첫 학기 초에 평양신사로 참배를 가야 했습니다. 

그날 신궁 앞 넓은 뜰 안에 전교생이 도열해 섰습니다. 그 때 교장선생이 맨 앞에 혼자 서고 그 뒤에는 선생들이 옆으로 섰는데 당시 김형석 교수는 키가 작은 편이라 앞자리에 서서 지나가는 교장 선생님의 모습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교장선생의 주름 잡힌 뺨으로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닦을 수가 없으니까 그대로 참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답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 기독교 교계에는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신사 참배를 목숨 걸고 거부한 성도들이 신사참배의 죄를 범한 성도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장로교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용서와 화해로 돌아왔지만 큰 상처를 남긴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하지만 연약하여 넘어진 자들을 또한 일으켜 세워주고 붙들어주어야 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주변에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왕따가 되다시피 한 어떤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가끔 예고 없이 저를 찾아오는데 얼마 전에도 저를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제게도 아주 공격적으로 대하다가 그냥 거부하지 않고 계속 보통 사람처럼 대해주니까 점차 누그러뜨려졌지요. 얼마 전에 저를 찾아와 복사를 할 것이 있다고 해서 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가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이 없느냐고 하더군요. 속으로는 기가 막혔지만 마침 그 때 누구와 나누어 먹으려고 싸온 점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먹으려고 한 사람이 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은 상태라 남겨둔 그 점심을 그에게 먹으라고 건네주었습니다. 그러자 다소 놀라면서 저더러 하는 말이 ‘목사님은 천사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저는 천사도 아니고 천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단지 그 불편한 상황에서 남아있는 조그만 긍휼을 베풀었을 뿐입니다.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보통 자기처럼 대하면 관계를 끊어버리거나 배척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왜 자기에게 이렇게 대하느냐고 하기에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변화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지요. 좀 어설픈 대답이었지만 진심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젊었을 때는 제 이미지 관리를 위해 남을 배려해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정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위였지요. 그 후 많은 사람들을 겪고 보니 어떤 사람들이 겉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도 나름대로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이유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만 보고 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야 했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것을 가지고 트집 잡고 자꾸만 공격적이 되어가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게는 누가 이웃인가? 내 주위에 강도만나 버려진 사람처럼 고통과 시련 가운데 쓰러져 있는 사람은 없는가? 내가 오늘 돌아볼 사람은 없을까?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나누어줄 사람은 없을까?’

정인 양이 안치된 경기도 양평 안데르센공원묘원을 운영하고 있는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는 이런 글을 SNS에 남겼습니다.
“친 자식도 아닌데 화초장 앞에서 하염없이 우는 젊은 엄마, 아빠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저미다 못해 찢어질 듯 아프다. 바다가 깊고 깊다 해도 저 슬픔의 깊이보다 깊을까?’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따라온 아이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장난감과 책들이 들려 있다. 정인이에게 건넬 선물들이라고 하며 어린 아이들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훔쳐보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치고 또 다시 울게 된다.
수목장을 운영하며 숱한 죽음과 추모의 장면을 지켜보던 내게 이번 죽음은 좀 달랐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어떤 이는 손에 꽃을 들었고 어떤 이는 아이를 위해 손 편지를 썼다. 인형이 매달렸고 아이가 좋아할 과자를 갖다 놓았다. 어두운 밤을 밝혀주고파 작은 태양광 등을 설치하기도 했다. 어떤 젊은 아빠는 연차를 내고 찾아왔다. 죽은 아이와 어떤 인연도 없었다. 그냥 그 죽음이 안타깝고 슬퍼서라고 했다. 그는 내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또 다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찾아오겠다며 떠났다. 가벼운 인사만 하고 가는 게 아니었다. 모두들 오래오래 머물렀다. 캐릭터 비석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차가운 잔디밭의 디딤석에 주저앉아 깊은 묵상에 잠기기도 했다. 모두들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지켜주지 못한 참회의 몸짓이었다. 나도 함께하고파 무릎을 꿇었다. 비로소 세상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아름다운 추모의 발길을 누가 이끈 것일까? 나는 안다. 뜨거운 가슴이 시킨 일인 것을... 덕분에 보일러보다 더 뜨거운 가슴을 얻었으니 이번 겨울이 그다지 춥지는 않겠다. 더 이상 고장 난 보일러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아침은 더 일찍 뽀로로 음악을 틀어주어야겠다.”

정말 차갑게 보이는 세상에서도 긍휼이 살아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아직 이 세상은 따뜻하고 희망이 있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긍휼의 가장 크고 위대한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을 가두어놓지 말고 흘러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만일 예배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한다면 그 예배는 더 이상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긍휼이 제사보다 우선입니다. 긍휼이 없는 삶의 예배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뜨거운 긍휼의 마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 사랑을 알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긍휼을 베풀 사람들을 찾아야 합니다.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가 예수님처럼 긍휼을 베푸는 삶으로 얼어붙은 내 주변과 사회를 녹이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우리를 살리려고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마음, 죽어가는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아프고 찢어질 듯한 긍휼의 마음이 아닐까요? 먼저 주님의 긍휼로 제게 넘치도록 채워 주십시오. 그리고 넘치는 긍휼을 나누어 줄 이웃을 보여 주십시오. 내 주위에 강도만난 이웃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다가가기 원하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주님의 긍휼을 나누어줄 수 있을지 가르쳐 주십시오. 내 문제, 내 필요만 부둥켜안은 채 씨름하기보다 함께 울어 줄 이웃을 찾고 보게 해 주십시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하시고 받은 만큼 그 긍휼을 강도만난 이웃에게 흘러 보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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