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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서 찾으라' (마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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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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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필오 작성일21-03-09 09:48 조회3,302회

본문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역하 15:10 아사 왕 제 십 오년 셋째 달에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고
15:11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 마리와 양 칠천 마리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고
15:12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15:13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15:14 무리가 큰 소리로 외치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15:15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이용규 선교사가 쓴 ‘내려놓음’이란 책에 보면 그가 몽골에서 선교사로 있을 때의 한 가지 경험을 그의 책 서두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2005년 봄,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 처소를 방문해서 예배드리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 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다. 그녀는 몇 달 전 우리 팀의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다. 그런데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 때 나는 하나님께 그녀가 잃어버린 소를 찾기보다 예배를 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 자매가 소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사람이 자기 힘을 의지하다가 안 되면 자신의 실패로 여길 수 있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다가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도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먼저 찾아온 것이다. 소가 아닌 예배의 기쁨을 선택한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게 된 것이다.”

우리 학교에 몽골에서 온 박사과정 자매가 한 사람 있습니다. 아주 신앙이 분명하고 열심이며 이전에 우리 교회에서 외국인을 위한 예배를 시작할 때 한 두 주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 후 몽골 공동체가 있는 교회로 가긴 했지만 지금도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교내 사역에 아주 열심히 동참하고 있는 자매입니다. 제가 전화로 이 이야기를 아느냐고 한 번 물어 봤더니 들어 본 적은 없지만 몽골에서는 소를 아주 소중하게 키운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소는 우유를 제공할 뿐 아니라 겨울이 되면 날씨가 너무 춥기 때문에 겨울철 동안 소 한 마리를 잡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제가 소 한 마리를 가족이 어떻게 겨울 내 먹느냐고 물어보니까 보통 몽골은 대가족이고 날씨가 추워서 보통 육식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소는 집안에 가두어 키우는 것이 아니고 혼자 풀을 뜯도록 밖으로 보내면 알아서 집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 새끼 송아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송아지가 컸거나 다른 사람이 훔쳐갈 경우, 그리고 사고로 죽는 경우는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예배를 드린 이 자매의 선택이 단순함을 넘어 어리석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언제든지 또 드릴 수가 있지만 잃어버린 소를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소보다 예배를 귀하게 여긴 그 자매의 마음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집을 나간 소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배 처소로 찾아 왔다는 것, 그것도 예배 마치자마자 돌아왔다는 것은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이었습니다.

과연 진정한 예배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예배의 중심이 설교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우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배의 목적이 단지 우리 마음의 위로와 평안, 안식을 찾기 위한 것일까요?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교훈을 찾는 것일까요? 만일 예배가 이런 목적이 된다면 중요한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무엇보다 예배는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가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렘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임재”란 히브리어 단어 “얼굴”에 대한 통상적 번역입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히브리식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다는 것은 그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 가운데 살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신다고 말씀합니다. 아니,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늘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찾으라고 말씀합니다. 항상 함께 하시는데 왜 또 찾아야 하지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나이 어린 손자가 수염이 긴 할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답니다. ‘할아버지는 주무실 때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이불 밖에 넣고 주무세요?’ 그 질문을 받은 할아버지는 좀 당황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늘 밤에 자보고 난 후에 대답해 주마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날 자면서 수염을 이불 밖에 넣어 봤습니다, 뭔가 허전했지요. 그래서 다시 이불안에 넣어보니까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또 이불 밖에 내놓아 보고 다시 허전해서 이불 속으로 넣고 이렇게 하다가 밤을 꼬박 새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늘 내 안에 계시지만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지금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임재 의식입니다.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차이가 있을까요? 물론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지요.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을 때 하나님은 늘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억울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상황에서 요셉과 함께 하셨지요. 어느 날 자기 주인 보디발의 처가 유혹을 했을 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말했습니다.
창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셉도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얼굴 앞에 서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시편을 통해서 얼마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기 원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6편입니다.
시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특별히 곤경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시 27편 8절입니다.
시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지만 그는 후일에 왕이 되고 난 뒤 편안해지면서 그만 하나님을 찾는 삶을 등한시하고 말았을 때 불륜과 살인이라는 무서운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왜 ‘항상 그의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돌이 안 된 둘째 손녀를 가끔 돌보다보면 재미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혼자서 노는 것을 놔두면 꼭 한 번씩 옆이나 뒤를 돌아보더라고요. 누가 옆에 있나 확인하는 겁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어떤 일에 열중하다가 돌아보면서 확인해 보는 것이지요. ‘하나님 아버지, 제 가까이 늘 계시는 거지요?’ 하나님이 옆에 계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순간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말씀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사왕은 솔로몬왕의 증손자였습니다. 즉 솔로몬 사후 남북 분열이 된 후 남유다의 세 번째 왕으로 4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집권 초기에 이방 제단과 모든 우상들을 없애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찾는 삶을 살도록 도전하였습니다. 14장 7절에서 말씀합니다.
역하 14:7 아사가 일찍이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그들이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상은 평안입니다. 그런데 평안은 편안함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평안을 구하기보다 편안함을 구합니다. 진짜 복이 있고 가짜 복이 있는데 진짜 복은 평안이고 가짜 복은 편안입니다. 물론 편안함이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편안함을 진짜 복이라고 생각하고 편안함이 행복이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예를 들어 좋은 집, 좋은 자동차가 편안함을 제공해 줄지는 몰라도 그것이 평안을 주지는 않습니다. 누구보다 많이 가지고도 여전히 불평하고 불만족스러우며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평안이 진짜 복입니다. 평안은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평온함과 행복감입니다. 그 평안은 세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편안함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가장 큰 복인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편안함을 찾는 삶은 늘 불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찾는 자는 비록 불편한 점이 많아도 평안하고 만족한 삶을 삽니다.

아사왕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가운데 성읍들을 세우고 망대와 성문을 만드는 등 외적의 침입을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0년 후 위기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구스 백만 대군의 침입을 받게 된 것입니다. 구스는 현재 에티오피아 지역이지요. 그야말로 국가의 운명이 달린 위기의 순간에 아사왕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역하 14:11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구스 군대는 전멸하다시피 패배를 당했고 유다군은 수많은 전리품을 얻게 됩니다. 승리하고 돌아온 아사왕 앞에 아사랴라는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역하 15:2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를 만난 순간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주셔서 그들을 위기에서 구원해주셨고 풍성한 전리품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특별상은 위기에서의 구원입니다. 아사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지방에서 다시 우상들을 제거하고 주님의 제단을 보수하는 등 또 다시 종교개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사왕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은 아사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남 유다 사람이 아닌 북 이스라엘 사람들도 왔습니다. 하나님은 좋고 편리한 건물이 있는 교회,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교회에 사람들을 보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내주십니다. 이 한 해 우리 교회,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찾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찾는 영혼들을 우리 교회에 많이 보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사왕은 백성들과 함께 모여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언약을 세웠습니다. 어떤 언약이었을까요?
역하 15:12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찾기로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젊은이들이든지 노인이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죽이기로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찾았을 때 하나님은 다시 사방으로 평안의 복을 주셨습니다. 만일 아사왕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럼 제 설교도 여기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게 됩니다. 약 25년간 전쟁이 없어 편안해지자 하나님을 찾는 삶이 그만 시들해져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때에 이스라엘 왕이 유다를 치려고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 때 아사왕이 취한 태도는 25년 전 구스의 백만 대군이 침입했을 때와 전혀 달랐습니다. 완전히 변해 버렸습니다. 아사왕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전과 왕실 창고에 있던 금은을 끌어보아서 아람 왕에게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원래 아람 왕국은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친 나라였지만 솔로몬 이후 나라가 쪼개지면서 약화될 때 강국으로 떠오른 북쪽 시리아 지역의 나라였습니다. 아사왕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도움을 구했고 하나님을 찾기보다 인간적인 수단을 의지했습니다. 금은을 제공받은 아람 왕은 군대를 보내어 북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은 유다를 침공하고자 하는 계획을 멈추고 퇴각하고 맙니다. 이제 다시 평안이 찾아오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평안이 아닌 편안이었습니다. 아사왕은 하나님을 찾음으로 평안을 구하기보다 사람의 힘을 빌려 편안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 때 선지자가 와서 아사왕을 책망합니다.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 말입니다. 이전에는 그토록 강한 구스 군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했을 때 왕의 손에 붙여주셨지 않았느냐고 질책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그런데 아사왕은 선지자의 말을 듣자 불같이 화를 내었습니다. 심지어 그를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그 일이 있고 3년쯤 지난 후 그의 발에 중한 병이 생겼습니다. 그 때 역시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역하 16:12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의사를 찾은 것이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혀 구하지 않은 것이 잘못입니다. 그는 25년 동안 하나님의 복을 받아 나라가 편안해지자 그만 나태해져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찾기도 하지만 평안해지면 더 이상 하나님을 찾는 것을 게을리 합니다. 그러다가 고통스런 환경이 오면 다시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있지만 과거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서 해결해 보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고속으로 달리던 차가 갑자기 방향을 돌리기가 쉽지 않듯이 우리의 죄악된 본성대로 계속 달리다가 갑자기 하나님께로 유턴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때로는 큰 사고가 나서 어쩔 수 없이 멈추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요. 작년 한 해는 우리 모두에게 크고 작은 고통과 혼란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정지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는 타성에 젖어 이 코로나 시대에 위기가 와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냥 인간적인 방법을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아사 왕이 말년에 병이 들었을 때 그 이전에 찾았던 하나님을 찾는 신앙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결국 2년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혹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무디어져 있습니까? 생소하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회개할 때입니다.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혹시 고난 중에 계십니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방법, 내 수단, 도와 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을 다시 부지런히 찾으실 때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에서 말씀합니다.
애 3: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지금은 우리의 삶을 조사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과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상을 주십니다. 평안과 구원의 전리품을 얻게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십시오.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일을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장 중요한 일로 삼으십시오. 이 한해가 저물기 전에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 빛 가운데 살아가며 평안과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함께 잠시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시간 그동안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삶을 게을리 했는지 스스로 조사해 보는 시간되게 하소서. 그리고 돌이켜 회개하며 올 한해는 하나님을 찾는 삶을 살겠노라 결심하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매일 우리 삶 가운데 함께 하시고 임재해 주옵소서. 주님의 얼굴을 떠나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늘 하나님의 얼굴 빛 가운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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